【화성인터넷신문】황기수 기자= 화성시 “남양의 700년 이야기보따리” 라는 주제로 지난 2일 남양복지회관 2층 강당에서 남양주민자치위원회(전창배 자치위원장)가 주최하고 애향청년회 주관으로 첫 인문학 강의를 열었다.
강의에 나선 이정일 연구원은 팔탄면 하저리가 고향으로 사학을 전공, 대학원에서는 지역사와 고문서학을 전공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 남자 이름으로 살다보니 이름만 보고 남자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우스겟 소리로 자기소개 후, 첫 강의가 시작했다.
이날 강의는 ‘화성시가 지나온 길’, ‘화성지역사의 분야별 특징’, ‘키워드를 통해 본 화성지역사’를 내용으로 진행되었다
화성시의 연혁을 소개한 ‘화성시가 지나온 길’에서는 삼한시대 마한의 54개국 중 남양지역에는 원양국이 위치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백제 시기에는 당항성, 고구려 시기에는 당성, 신라 경덕왕 16년(757) 이후에는 당은군으로 불렸다.
그 후, 고려 충선왕 2년(1310) 비로소 지금의 ‘남양’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까지 천 년 이상 독자적인 행정구역으로 존재하였다고 설명했다.
시대별․분야별로 화성시 역사의 특징적인 부분을 설명한 ‘화성지역사의 분야별 특징’에서는 삼국시대 당항성(서신면 당성)이 대 중국 교통로로서 삼국이 이곳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쟁탈전을 벌였다.
많은 외교사절과 학자들이 이곳을 통해 중국을 오고 갔다고 하면서, 특히 중국의 ‘송고승전’이라는 책에 의하면 의상과 원효가 당나라로 가다가 ‘당주(지금의 남양)’의 경계에 이르러 토굴에 몸을 숨겼는데, 이곳에서 대오각성하게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소개했다.
이어서 조선시대 남양부 지도를 통해 남양부사가 기거하며 정무를 보았던 남양부 관아(지금의 남양초등학교 인근),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기 전의 남양향교(남양중․고등학교 인근), 조선 중기까지 서해 중부의 주요 군사기지였던 화량진과 염불산․해운산 봉수 등의 위치를 살펴보았다.
또한 조선시대 화성지역의 특징 중 하나로 다양한 당파와 성격을 가진 사족들이 많이 세거하고 있으며, 이들 문중에서 다수의 고문서가 발굴되어 경기지역 사족 연구의 좋은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리고 우리지역에서 발굴된 주요 고문서 중, 조선시대 관리에게 주는 임명장과 정조 임금이 밤새워 채점한 시험지, 신입관원을 길들이는 의례에서 사용된 면신례 문서, 부인과 딸을 노비로 파는 매매계약서 등도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또한 근현대사 부분에서는 제암리와 수촌리 등에서 자행된 일제의 잔악한 만행은 그 배경에 어느 지역보다 치열하고 격렬했던 화성지역민의 독립운동이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앞으로 화성시의 독립운동과 관련하여 보다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마지막으로 충(忠), 효(孝), 예(藝), 학(學), 무(武)의 5가지 키워드를 통해 화성시의 대표적인 인물들을 소개하였다.
충(忠)과 관련된 인물로는 병자호란 때 청병과 맞서 싸우다 사로잡히자 ‘머리를 잘릴지언정 무릎은 구부릴 수 없다’고 저항하다 순국한 충신 남양부사 윤계의 일화를 설명했다.
효(孝)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정조(正祖)에 앞서 고려시대 인물인 최루백이 아버지를 해친 호랑이를 찾아 엄히 꾸짖자 미물인 호랑이도 그 효성에 감복하여 꼬리를 내리고 엎드렸고 이에 최루백은 도끼로 범을 잡아 아버지의 뼈를 수습하여 묘를 만들고 그 옆에 여막을 지어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효를 다하여 조선시대 국가에서 인정받는 효자로 손꼽히게 되었다 했다.
예(藝)와 관련해서는 정조(正祖)의 문체반정에 저항하며 송산면 지화리에 기거하면서 주옥같은 소품체 작품을 남긴 문인 이옥과 남양읍 활초리 출신의 음악가 홍영후, 일제에 저항하며 절필한 홍사용, 향남읍 출신의 무용가 이동안 등을 소개했다.
이날 2시간이 넘게 이어진 “남양의 700년 이야기 보따리” 특강에서 700년 역사를 설명하기는 역 부족이었다. 특히 충. 효. 예의 고장이 이곳 남양부였다는 사실에 이곳 주민들도 이정일 연구원의 강의에 귀를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