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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여행) 옛 고택에서 만나는 역사기행 - 영조의 막내 딸 화길옹주가 살던 ‘궁집’
  • 기사등록 2015-11-13 13: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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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특별취재팀 = 궁집은 옹주가 살던 집이다. 조선조 제21대 영조의 막내딸이자, 정조의 막내고모인 화길옹주가 살던 집이다. 중요민속문화재 제130호인 이 집은 남양주시 평내동 426 - 1에 소재한다. 화길옹주가 능성위 구민화에게 시집을 가자, 영조가 옹주를 위하여 지어준 집이다.

 

 

아마도 영조가 막내인 화길옹주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던 것만 같다. 하긴 영조에게 아들은 유일하게 사도세자 한 명 뿐이었다. 이 궁집은 나라에서 재목과 목수 등을 보내어 집을 지었다고 해서 궁집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집은 현재 기와와 초가집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집고 있는 무의자박물관경내에 소재한다. ‘무의자(無衣子)’란 말 그대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벌거숭이로 태어나 몸에 옷을 거침으로 비로소 삶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이곳에는 궁집을 비롯하여 비슷한 연대의 집들과 각종 석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화길옹주가 결혼생활을 하던 집

 

한 낮의 더위가 살인적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안내판을 보고 땀을 흘리며 찾아간 궁집 입구는 철문이 굳게 잠겨 있다. 작은 쪽지에 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더니, 인터넷에 다 나와 있으니 인터넷을 보라는 것이다. 신문사에서 왔다고 해도 마찬가지 대답이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훼손을 하는 바람에 아예 개방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몇 번을 더 이야기를 하고서야 열어주는 철문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경내에는 여기저기 안전막을 친 곳이 보인다. 하지만 공사를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곳에 있는 고택 중에 궁집이 중심이 된다.

 

궁집은 한 마디로 어느 대궐의 크지 않은 전각을 보는 듯하다. 그만큼 집 자체의 치목이나 석재 등이 뛰어나다. 영조가 막내딸을 위해 지어준 집이고, 화길옹주가 출가하여 세상을 뜰 때까지(1765~1772) 이곳에 거쳐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마도 이 집은 1765년경에 지어졌을 것이다. 25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집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반 집

 

궁집은 조선시대 전형적인 양반집의 형태이다.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구성이 된 이 집은 안채를 자 형으로 꾸몄다. 안채는 부엌이 4, 3칸에 앞퇴를 한 칸 더 놓았다. 정침 좌우의 날개는 방과 곳간을 드렸고, 남행랑에는 곳간과 중문이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광이 있고, 그 앞에 안마당을 가로 질러 우측 날개채에 부엌과 건넌방이 있다.

 

정면으로는 가운데 안방을 두고 양편에는 대청과 부엌을 두었다. 안방 앞에서 대청까지는 툇마루를 놓아 동선을 이어주고 있다. 좌측 날개채에는 아랫방과 광이 있고,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있다. 사랑채는 안채의 서남쪽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자 형으로 방 두 칸 이외에는 모두 누마루를 깔았다.

 

서남쪽 끝에는 돌출을 시켜 누정인 누마루 한 칸이 있다. 날아갈 듯한 처마를 가진 이 누정은 장초석으로 주추를 놓고, 그 위에 누마루를 깐 형태이다. 기단 역시 잘 다듬은 장대석을 이용해 집의 품위를 높인 듯하다. 사랑채의 북쪽에는 기단을 높이 쌓았는데 그 위에 우물을 있다. 이 우물은 안채 큰 부엌의 뒷문 쪽이기도 하다.

 

 

 

 

배수로에서 볼 수 있는 집의 격조

 

화길옹주가 살았다는 이 궁집은 한 마디로 그 어느 집보다 격조가 있는 집이다. 양반가의 큰 집을 수도 없이 보아왔지만, 그리 크지 않은 집 구조를 갖고 이렇게 쓰임새 있게 지은 집 구조는 그리 흔치가 않다. 그 중에서도 사랑채 뒤편 장대석을 이용해 3단으로 쌓은 축대 위에 마련한 우물과 배수시설은 가히 일품이다.

 

우물에서 물이 흐르는 것을 석재로 물이 빠지는 배수시설을 만들고, 그 흐르는 물을 땅 속으로 흐르게 하여 배수구가 사랑채 뒤편으로 빠지게 하였다. 낮은 야산을 등지고 있는 궁집의 건조함을 막기 위함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가 임수(臨水)’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곳에서 한 세상을 살다간 화길옹주. 비록 옹주의 신분이었지만, 살아가는데 있어서 또 다른 행복을 느꼈을 것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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