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인터넷뉴스】하주성 기자 = 전국을 여행하다 보면 참 부끄러움을 많이 느낀다. 곳곳에 산재한 작은 비석 하나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요즈음을 ‘여성상위시대’라고 한다.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대단한 활동을 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여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은 남녀평등 사회가 오려면 멀었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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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북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에서 만날 수 있는 수열비각 |
전북 장수군 계남면 화음리에는 ‘수열마을’이라 부르는 곳이 있다. 이 마을의 이름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으니, 바로 열녀 해주오씨 부인의 이야기에서 비롯한 이름이다. 수열마을 입구에는 작은 언덕위에 비각이 하나 서 있다.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으로 된 이 작은비각은, 장수군의 여인들이 얼마나 절개가 곧았는가를 잘 알려주고 있다.
장수는 ‘의녀(義女)’의 고장이다. 1593년 7월 29일, 임진왜란 때 진주 촉석루 아래 의암에서 왜장을 안고 남강 푸른 물로 뛰어든 의녀 주논개를 비롯하여, 많은 여인들이 꿋꿋하게 절개를 지키기 위해 죽음을 택한 고장이다. 장수군을 답사하면서 보면 이러한 열녀들의 이야기를 수도 없이 들을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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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각 안에 서 있는 비 |
의녀의 고장 장수를 가다.
우리 문화재 답사를 하던 날 전주를 출발해 장수로 향했다. 장수읍 방향으로 19번 도로를 타고가다 보면 ‘수열비’란 문화재 안내판이 보인다. 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조금 들어서면 멋진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곳에 비각이 서 있다. 이 비각은 최근에 세운 것이며, 그 비각 안에는 ‘수열평(樹烈坪)’이라 쓴 비석 한 기가 서 있다.
이 비를 ‘수열비’라고 하는데, 그 뒤편에는 ‘세임진위양사순처오씨열행립(歲壬辰爲梁思舜妻吳氏烈行立)’이라고 내리쓰기로 하였다. 임진년에 양사순의 처 열녀 오씨의 덕행을 세운다는 뜻이다. 앞에 쓴 수열평이라는 글씨는 조선조 선조의 손자인, 낭선군 우가 쓴 것이다. 이 비를 세우고 마을 이름을 ‘수열’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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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년 오씨를 기리는 비 |
‘이놈들 더러운 이 유방을 가져가라’
조선조 선조 30년인 1597년은 정유재란이 일어난 해이다. 전라도로 침입한 왜병들은 남원성을 무너트리고, 금산, 장수 등 내륙으로 들어와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곳 수열마을에도 왜병들이 들어와 마을에서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산 중에 있던 이 마을에는 아마도 그런 난리가 났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는가 보다.
방에서 삼베를 짜고 있던 양사순의 처 해주오씨는, 갑자기 들이닥친 왜병들을 보고 놀랐을 것이다. 왜병들은 양사순의 집 방으로 들어와 해주오씨의 유방을 강제로 만지며 희롱을 하였다. 이에 격분한 양사순의 처 해주오씨는 부엌으로 들어가, 왜병들이 만진 유방을 부엌칼로 잘라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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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열비각 옆에 서 있는 소나무 |
“더러운 놈들이 만진 이 유방을 가지고 가라”
고 일갈을 하는 해주오씨의 호령에, 왜병들은 혼이 나가 문 밖으로 달아나버렸다. 그 길로 해주오씨는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말았다. 이러한 해주오씨의 행동이 그 마을에 위엄 있는 정신을 심었다고 하여, 마을 이름을 ‘수열(樹烈)’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마을에서는 지금도 수열비가 서 있는 앞뜰을 수열평이라 부른다. 수열평에 바람이 분다. 아침에는 쌀쌀하던 날씨가 오후가 되면서 기온이 올랐다. 수열비 앞에 서서 고개를 숙인다. 어느 누가 감히 이런 장한 행동을 할 수가 있었을까? 이렇게 죽음으로 자신을 지킨 해주오씨의 행동에, 어떠한 말로 위로를 할 수가 있을까?
비록 장중하지 않고 초라한 비이기는 하지만, 그 비석 안에 담긴 뜻은 어떤 화려한 것들보다도 더 아름답지 않은가? 오늘 여인이긴 하나, 해주오씨의 당당함을 보고 과연 이 시대에도 이런 여인이 있을까 궁금하다. 간통죄가 폐지되고 난 후 여기저기서 숱한 풍문들이 들린다. 물론 일부의 사람들이긴 하지만 고삐가 풀렸다고 한다. 누가 그 고삐를 잡을 것인가? 오늘 해주오씨의 수열비가 다시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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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수군청 앞에 서 있는 천연기념물 의암송 |
의암송과 논개 생가지도 들려보아야
장수군에는 의녀 논개가 심었다고도 하고, 남편인 최경희가 심었다고도 전하는 소나무가 한 그루 있다. 수령이 약 500년 정도가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천연기념물 제397호인 ‘징수 의암송(義岩松)’은 전북 장수군청 청사 입구 앞에 자리하고 있다. 이 나무를 돌아보고 난 후 찾아가볼만한 곳은 바로 논개의 생가지이다.
장수군 대곡면 주촌에는 의녀 논개의 성역으로 조성이 되어있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논개의 동상과 조부모의 묘, 그리고 논개의 생가를 복원한 초가 등이 자리하고 있다. 논개의 생가지는 2만 여 평의 땅에 논개를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조형물들이 있고, 그 한편에 초가로 지은 논개 생가를 복원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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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개 생가지에 복원한 초가집 |
논개는 조선조 선조 7년인 1574년 9월 3일, 이곳 장수군 주촌마을에서 아버지 주달문과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래 주촌마을에는 생가가 있었으나, 1986년 대곡저수지 축조로 수몰이 되었다고 한다. 현재의 복원된 집터는 논개의 할아버지가 함양군 서상면에서 재를 넘어와, 이곳에 서당을 차렸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의녀의 고장 장수군. 주말여행지로 아이들과 함께 찾아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들려주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