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인터넷뉴스】하주성 기자 = 우리나라 옛 형벌 중에 가장 험한 꼴을 당하는 것이 ‘위리안치’라는 형벌이었다고 생각한다. 경북 영주 소수서원을 조금 지나면 금성대군 신단이 있고, 그곳을 조금 지나 좌측 마을 길 안으로 들어서면 금성대군이 위리안치를 당했던 위리안치지가 있다.
▲ 금성대군 위리안치지
‘위리안치’란 허허로운 벌판의 땅굴 속에 사람을 가두어 두는 형벌을 말한다. 세종의 여섯 째 아들인 금성대군이 이곳 집 한 채 주변에 없는 벌판에서, 형인 수양의 욕심으로 인해 역적의 누명을 쓰고 위리안치를 당한 곳이다. 단종의 숙부이기도 한 금성대군은 1452년 어린 조카인 단종이 복위하자, 형 수양과 함께 단종을 도울 것을 약속하지만 형의 왕좌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위리안치를 당한 것이다.
금성대군은 1456년에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등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이 실패를 하자, 이에 연루되어 다시 경상도 순흥으로 옮겨졌다. 금성대군은 이곳에 와서 부사 이보흠과 함께 거사를 일으켜 수양을 몰아내려
고 하였으나, 관노의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을 당한다.
▲ 순흥으로 유배되는 금성대군
가장 극악한 형벌 중 하나인 '위리안치'
다시 설명하지만 조선시대 형벌 중에 유배형에 해당하는 것은, <부처>와 <안치>가 있다. 부처란 유배형을 당한 죄인이 부인과 함께 유배지에 머물며 생활을 하는 형벌이다. 안치란 부처형을 받은 죄인이 왕족이나 고관일 경우, 유형을 받은 장소에서 주거와 행동을 제한시키는 형벌제도이다.
안치에도 종류가 있다. 고향 등으로 행동을 제한시키는 <본향안치>. 육지와 떨어진 절해고도에 안치를 시키는 <절도안치>. 그리고 가장 중형에 속하는 <위리안치>이다. 위리안치는 형벌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형벌이라고 한다. 큰 죄를 범한 죄인을 허허벌판에 돌우물 같은 웅덩이를 파고, 그 안에 죄인을 가두는 놓는 형벌이다.
▲ 돌웅덩이인 위리안치지
위리안치지는 처형을 당할 때까지 죄인을 가두어 두는 곳이다. 그러나 그 ‘옥(獄)’이라는 곳이 일반적인 옥과는 다르다. 주변에 인적이 없는 벌판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어 둔다. 안은 발을 뻗을 수조차 없는 곳이다. 누울 수도 앉아 있을 수도 없는 웅덩이.
거기다가 인근에는 물이 흐르기 때문에 바닥은 축축하다. 비바람이라도 불라치면 웅덩이 안으로 물이 차 들어온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곳이다. 아마도 처형을 당하기도 전에 미리 기암을 하지나 않으려는지 모르겠다. 웅덩이 밖으로 나간다 해도 도망을 갈 수가 없다. 위리안치지 주변이 모두 가시가 돋은 탱자나무 울타리이기 때문이다.
▲ 위리안치지의 울타리는 탱자나무로 둘렀다
마음의 '위리안치’에서 벗어나자
이러한 위리안치는 꽁꽁 갇혀있는 곳이다. 누구도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다. 이런 위리안치지처럼 세상을 살아가면서 혹 스스로의 마음을 닫아걸고 있지나 않은지 모르겠다. 위리안치지에 갇힌 사람들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집과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자. 만일 내 마음 어딘가에 꽁꽁 닫힌 곳이 있다면, 과감히 마음의 벽을 허물고 벗어나야만 한다.
요즈음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아집과 편견으로 뭉쳐진 사람들이 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매사에 자기 생각만을 고집한다. 스스로를 위리안치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저 자신 생각만이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듯 행동하고, 자신의 생각 외는 그 어느 것도 수용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마음을 위리안치라는 웅덩이에 빠트리고 있는 것이다.
세상은 소통하면서 살아가는 곳이다. 내가 최고란 생각은 위험하다. 이제는 마음을 열고 어두운 곳을 돌아볼 줄 아는 대인이 되어보자. 위리안치에 스스로 들어가는 일이 없도록 모든 것을 열어젖힐 대, 비로소 세상이 반기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