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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1)부산동을 ‘재인마을’로 지정하자 - 부산동은 최고의 전통예술마을이었다
  • 기사등록 2015-07-21 10: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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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동에 소재하고 있는 당집. 현재도 주민들이 당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오산인터넷뉴스】하주성 기자 = 우리는 흔히 재인청이라고 하면 많은 재인들이 모여 있던 민간단체로 알고 있다. 재인청은 130년 동안 지속이 되다가 폐청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재인청이 얼마나 대단한 곳이었는지, 화성재인청과 경기재인청을 같은 곳인지, 혹은 다른 곳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그 이유는 재인청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재인청을 남무인 화랭이들이 모여 있던 곳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재인청이 폐청이 되고난 뒤 그곳에서 예능을 익힌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경기도 일대에 산재해 있는 도당 등에서 함께 굿을 영위했기 때문에, 재인청은 화랭이들의 모임인 것으로 잘 못 알고 있을 뿐이다.

 

재인청은 조선조 순조 때인 1784년부터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이 펼쳐지던 1920년대까지 경기도와 충청, 전라도에 있었다고 한다. 재인청은 순조 이후부터 각 처에 분산되어 있던 재인들이나 무속인(남무인 화랭이와 여무인 미지를 포함해) 들을 규합하고, 이들에게 기능을 가르쳐 배출하던 기관이다. 재인청은 민간기구이면서 많은 예능인들의 활동을 행정적으로 장악하던 기능을 갖고 있던 모임이었다.

 

재인청은 재인들을 관리하던 기관

 

재인청이 폐청이 될 당시 재인청에 속해있던 재인들이 4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3도에 걸쳐 활동을 하던 많은 재인들은, 재인청을 거치지 않으면 활동을 할 수 없었다고 할 정도였다. 재인청에는 전문예능인으로써 갖춰야 할 기능인 판소리, 땅재주, 줄타기, , 굿 행위 등 모든 기능을 학습이라는 공부를 통해 익혀야만 했다.

 

재인청에서 재주를 익히는 학습은 매우 엄격하였다고 전해진다. 화성재인청의 규모는 모든 예술인들을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조 말의 근세 명창이라는 이동백, 정정렬, 송만갑, 김창환 등은 물론, 그 외에도 당대에 명성을 떨친 많은 재인들이 이 재인청을 거쳐나갔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에 재인청은 예인들의 본산이었다는 것이다.

 

일제시대인 1938년에 간행된 <조선무속의 연구>(赤松智城, 秋葉 隆 공저)에 보면 수원군 성호면 부산리 한촌(현 오산시 부산동)에 거주하고 있던 이종하의 집에 <경기도 창제도청안>(도광 16(1836) 정월 수정) 1책과 <경기재인청 선생안>)(함풍 원년(1851) 2월 수정) 1, 그리고 <경기도 창제도청안>(광무 5(1901) 9월 수정) 2책이 전해지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문서를 보관하고 있던 이종하 가계는 11대째 전해지고 있는 세습무가로, 당시 그의 집안에는 무녀 5명과 재인 6명을 포함한 세 집으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오산시 부산동에는 이종하의 손자인 이용우가 집제를 맡아했다는 당집과 우물 등이 남아있으며, 매년 주민들이 이곳에서 제를 거행하고 있다.

 

▲ 당집 옆 나무 곁에는 목장승이 놓여있다

 

부산동에는 경기재인청이 있었다.

 

<조선무속의 연구>에는 이종하의 동생인 이종만은 도산주를 맡아보았으며 재인청을 광대청’, 혹은 화랑청이라고도 불렀고, 경기, 충청, 전라 3도의 각 군에 재인청이 있었다고 했다. 각 도에는 도청(道廳)이 있고, 도청의 장을 대방이라고 헸으며, 대방 밑에는 도산주’ 2명이 있어 그들을 좌도도산주와 우도도산주로 불러, 한 도를 도산주들이 좌, 우로 갈라 관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도산주는 대방을 보좌하고 중요한 사항을 평의하는 역할을 하며, 도산주 밑에는 집강 4명과 공원 4, 그리고 장무 2명을 두었는데, 집강과 공원은 간사에 해당하고 장무는 서무계의 역할을 담당했다. 당시에 각 도의 재인청과 달리 군에 있는 재인청의 수장은 청수라고 불렀으며 그 아래에 공원과 장무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당시의 내용으로 보아서 경기재인청과 화성재인청은 같은 기구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다. 경기재인청은 현 오산시 부산동 이종하의 가문이 있었던 곳에 있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즉 삼도(경기, 충청, 전라)에 있던 재인청의 수장을 대방이라 부르고, 모든 재인청을 총괄하는 재인청의 수장을 도대방이라고 하였으며 그 위치는 화성 어딘가에 있었다는 것이다.

 

천한계급인 재인청의 사람들

 

재인청이 활성화가 되도록 일조를 한 사람들은 무속을 업으로 삼는 산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의 사회상을 보면 무속은 많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미신이라고 밀어붙이며 신사참배를 강요했던 일제 강점기에 들어 굿을 하는 무속인들의 위치는 더욱 낮아지게 되었을 것이다. ‘미신(迷信)’이라는 용어 자체가 일본인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무당이나 화랭이, 음악을 하는 산이 등은 그 위치가 낮아져 일반 중인들조차 이들과는 혼인을 하는 것을 꺼려했으며, 천민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이런 당시의 사회상이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무격과 산이들이 사돈을 맺는 일이 허다해졌다. 현재 밝혀진 산이들의 가계를 보아도 이들은 대개 한 지역에 무리를 지어 살아오면서 서로 타 무리들과 결혼을 한 경우가 대다수이다.

 

당시 이들 산이에 대해 조선민속지(朝鮮民俗誌) 저자인 아키바 다카시(秋葉 隆)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남부지방으로 가면 산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서로 혼인할 수 있는 무당, 화랑, 재인, 광대 등의 천민계통을 의미하는 비밀어다. 그들 앞에서 이 말을 사용하면 몹시 감정을 상하게 하는 비어로써, 산이의 일족을 보면 보통사람과는 다른 피를 가진 부정한 혈족, 귀신이 들린 혈통으로 생각하여 사람들은 이들과의 결혼을 꺼린다.‘고 적고 있다.

 

도광(道光)16년인 병신년(1836) 정월에 수정된 경기도창재도청안의 훈서를 보면 "아성(亞聖)께서 가르쳐 말씀하시기를 술()은 택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셨다. 우리들의 술은 이미 택하지 않은 것이 진실로 심하도다. 그러나 우리들의 천역(賤役)을 조정에서는 천하게 보고, 향읍에서 또한 가련하게 내려다보면서 우리들을 사람들의 끝자리에 놓는다. 그런즉 우리 무리들 또한 천역으로서 스스로를 버리려고 하는가? 그러므로 자고이래로 서로 유유상종이라 하였으니 청을 설치하고 계를 만들어 자리를 배열하고 안을 만들었다. 대방께서 영솔하시니, 영솔하기 위하여 대방을 따르는 것으로 우리 청의 규칙을 삼는다. , 우리 계원 4만인은 어찌 스스로 멸시하고 규약을 깨트릴 수 있을 것인가?"(下略)

 

이를 보면 당시에 자신들이 스스로 비천한다고 하였으며 향읍이나 마을에서도 자신들을 맨 끝자리에 놓는다고 스스로를 밝히고 있다. 결국 이러한 당시의 사회상이 역설적으로 이들이 수많은 재능을 전승시키는데 일조를 한 것이다. 즉 그들은 같은 동류끼리 서로 혼사를 맺음으로 해서 자신들이 갖고 있는 기능을 서로 공유하였으며, 무리들이 힘을 합해 재인청이라는 거대조직을 만든 것이다.

 

부산동은 바로 이런 재인청이 자리하고 있던 곳이다. 꼭 부산동이 아니라고 해도 오산 어딘가에 재인청이 자리하고 있었을 확률이 높다. 결국 오산은 우리나라 전통예술의 총 본산이며, 이종하 가문은 11대째 전승되어 온 예능인의 집안이다. 부산동을 재인(才人)마을로 올려놓아야 하는 이유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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