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인터넷뉴스】김지헌 기자
파밭 가에서
김수영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새벽에 준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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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김수영
김수영 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자유’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등 상처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겪는다. 그는 어떤 상황이나 시대상에 부합하려고 하지 않으려고 했다.
지금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지만 1960년 4.19 혁명 직후, 김수영은 ‘김일성만세’라는 시를 발표한다. ‘언론의 자유를 인정하려면 이것만 인정하면...’이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이다. 그것만 봐도 김수영은 체제에 대한 타협이 없었음을 시사한다.
김 시인의 시로 유명한 것은 ‘풀’이 있는데 이는 유작이 돼버렸다. 위의 시 ‘파밭 가에서’는 1959년 발표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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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시를 읽다보면 ‘붉은 파밭’이라는 시각적 시어가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리 붉게 보려고 해도 파밭은 푸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붉은 파밭에서 푸른 새싹을 보라니 좀 아이러니하기도 하다.
하지만 파가 자라기 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이제 막 붉은 흙을 뚫고 자라나는 새싹을 가진 파. 그 붉은 모습을 벗어나야 그제야 파란 파밭이 될 것이다.
그리고 다음 구절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에서 이 시는 완성된다. 붉은 땅이 자신의 모습을 잃는 것이 두려워, 파의 새싹을 품어내지 않는다면 푸른 파밭이 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