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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역사의 청렴과 탐욕 두얼굴 - 관리들 비리·부정부패 법에 따라 준엄하게 처벌
  • 기사등록 2014-04-02 13:4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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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기고> 홍진영 오산소방서장 = 「중국 역사의 청렴과 탐욕 두얼굴」

 

수재라고 뽑혀 온 자들은 책을 알지 못하고, 효성스럽고 청렴하다고 뽑혀 온 자들은 아비와 따로 사네.

 

모든 것이 진흙탕에 뒤엉켜 흐려졌고 고관과 좋은 장수들은 닭처럼 겁을 먹는구나.

 

중국 양한시대 당시 장안에 떠돌았던 노래가사다.

 

우리는 늘 전통적인 도덕관념에서 예의와 염치를 입신처세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중요한 잣대로 삼는다.

 

예의란 사람을 다스리는 큰 법이고, 염치란 사람을 세우는 큰 마디라 할 수 있다.

 

관리나 사대부로서 청렴한 사람은 틀림없이 염치가 있고 인격이 고상한 반면, 탐욕스러운 자는 무치하고 인격적으로 성숙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럼 중국 역사상 천하제일 청백리는 과연 누구였을까?

 

물론 역대로 ‘천하제일 청백리’가 누구인가를 놓고 평가나 선정 작업이 별도로 있었던 건 아니지만 천하제일 청백리라는 말은 청나라 초기 강희제가 1681년 직예순무 우성룡을 만난 자리에서 말한 것이다.

 

우성룡이 평생 청렴하게 지내며 많은 공적을 남겼기에 강희제는 공개적으로 그를 칭찬하며 이런 명예로운 호칭을 줬다.

 

그리고 우리에게 익숙한 또 한사람, 역대 왕조 가운데 북송시대에 이름난 청백리였던 포청천.

 

‘철면무사’라는 별명으로 불렸지만 그 누구보다 마음이 따뜻했으며 평생 공평무사하게 법을 집행하면서 정직하게 살았던 위인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청백리이자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준 정의의 화신으로 추앙을 받는다.

 

그가 평생 남긴 족적은 각종 역사 기록에 고스란히 남아 고찰이 가능하다.

 

포공이 권력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 준 일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한다.

 

또한 포청천이 정의의 화신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건 어진 군주 인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에 자연스럽게 역사상 최고의 탐관오리는 누구인가에 의문이 나올 수 있는데 그 부분은 정확한 근거가 없기에 언급을 자제하는 게 옳겠다.

 

2000년이 넘는 전제왕조시대 중국 역사는 늘 평화와 혼란이 반복되는 ‘일치일란’의 연속이었다.

 

청백리는 대개 치세 혹은 적어도 천하가 어느 정도 안정된 시기에 나타나곤 했다.

 

역사를 탐구하는 목적은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알고 과거를 현재에 유용하게 활용하는데 있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고대에 흔히 시행되었던 대 사면조치 대상에 탐관오리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 태종과 송 태조의 경우 관리들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단히 민감해서 조금도 용서치 않고 엄벌에 처했다.

 

역대 제왕들이 이처럼 탐관오리들을 사면하지 않은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데 생각이 깬 황제라면 탐관이 황제의 발을 갉아 먹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중국 역사는 탐관오리를 막기 위한 좋은 방법을 적지 않게 제시하고 있다.

 

과거제도의 3공, 즉 공평과 공정 그리고 공개 원칙을 지키려고 애썼다.

 

또한 악비는 “문관은 돈을 받지 않고 무관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으며, 송나라 때 관리들이 다른 곳으로 전근가거나 승진할 때마다 일정 등급의 관리를 보증인으로 삼았던 제도, 그리고 비리를 저지르면 죽을 때까지 차별 당하고 퇴직한 뒤 받는 각종 특례에서 조차 낮은 대우를 면치 못했다.

 

이처럼 청렴은 예부터 지금까지 강조되는 관리로써의 본분임에 틀림이 없다.

 

중국 역사에서 보듯이 청렴한 자는 후세에 본보기가 되고, 부패한 자는 크나큰 댓가를 치른다는 사실을 현직의 모든 공직자들은 자각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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