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오산에 전하는 신비한 옛 이야기들(41) - 이영주 기자, 구비전승48회 지명유래-신장동①
  • 기사등록 2014-02-01 13:00:07
기사수정

【오산인터넷뉴스】오산시 신장동은 내삼미동, 금암동, 수청동, 은계동 네 개의 법정동으로 구성돼 있다. 신장동 첫 번째 법정동 내삼미 1동 이야기를 전한다.

 

▲ 신장동은 궐리사를 중심으로 마을 형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 신장동

1989년 궐리 일부와 수청리, 금암리, 내삼미 1리와 2리, 은계리를 통합해 10통70반으로 동이 됐다. 원래 1789년(정조13)에는 시봉면, 삼미면 지역이었으며 1899년에는 문시면 지역과 초평면 지역으로 있다가 1914년 문시·초평·어탄면에도 포함됐다.

 

신장동 지역은 조선시대 중규면 구정촌이라는 색다른 지명이 등장하기도 했다. 중규면이라는 지명은 다른 문헌에는 그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공씨 족보에 등장).

 

신장동은 궐리사를 중심으로 오랜 세월 동안 마을 형성에 크게 이바지 한 곳으로 최근에는 대형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면서 한때 오산의 6개 동 가운데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기도 했다.

 

* 새장터

신장동의 궐동에 있는 땅이름이다. 6·25 전쟁 이후 오산천 변에 새로 생긴 장터라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쇠장터라고 불렸다.

 

지금은 우시장이 청학동으로 옮겨졌으나 예전에는 이곳의 우시장이 유명해 붙여졌다고도 한다.

 

* 피난민촌

신장동의 궐동에 있었던 땅이름이다. 6·25 전쟁 때 피난민들이 정착해 살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내삼미동은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 소나무골로 불렸었다.

 

■ 내삼미동

삼미동은 원래 주변에 소나무가 많아서 소나무골, 즉 송리(松里)라 불렸는데 조선시대 정조가 아버지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천봉할 때 행차해 경기도관찰사에게 마을 이름을 물으니 ‘문시면 송리’라고 아뢰었다고 한다.

 

정조가 ‘문시에는 오동나무, 죽미에는 대나무, 삼미에는 소나무가 아름답고 많으니 삼미라 부르라’고 해서 삼미가 됐다고 전한다. 마을의 안쪽은 ‘안삼미’ 즉 내삼미가 됐으며 바깥쪽은 외삼미라 됐다고 전한다.

 

▲ 내삼미1동

 

* 삼미

원래는 동네 주변에 아름다운 소나무가 많아서 소나무골, 즉 송리(松里)라 불렸다. 조선 정조 임금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태안)으로 천봉할 때 행차해 경기관찰사에게 마을 이름을 물었는데 ‘문시면 송리’라고 아뢨다.

 

정조 임금이 화산에서 마을쪽을 바라보며 ‘문시에는 오동나무, 죽미에는 대나무, 삼미에는 소나무가 아름답고 많으니 삼미(三美)라 부르라’라고 해서 삼미가 됐다고 한다.

 

그 중 마을 안쪽을 내삼미, 바깥쪽을 외삼미라 부르게 됐는데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1789년(정조13)까지는 삼미면 또는 삼미곡면으로 기록하고 있어 삼미가 아주 오랜 옛날에는 하나의 면(面)이었음을 알 수 있다.

 

* 내삼미

안삼미, 안삼미실, 안삼미곡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며 모두가 삼미의 안쪽 마을이라는 뜻이다. 내삼미 지역은 경주 김씨와 용인 이씨의 세거지로 이들이 정착해 살면서 마을을 형성한 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 오미

삼미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것 다섯가지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재의 오산시 전체가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삼미의 원동(園洞)에는 아름다운 동산에 꽃밭이 아름답고 초평에는 석양에 아름다운 물을 가리켜 부른 것이라고 전한다.

 

예전에 원동(지금의 대원동) 일대에는 동산에 꽃이 만발해 보기가 좋았고 초평으로는 지금의 오산천에 배가 들어올 정도로 물이 많아 석양에 바라보는 초평쪽 오산천의 물이 무척 아름다워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 큰말

내삼미 1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 양짓말

내삼미 1동의 북쪽 반달산 밑의 마을로 양지바른 곳에 위치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며 큰말의 북쪽에 있어 웃말이라고도 부른다.

 

* 망굴

양짓말 너머의 마을로 지금은 없어졌으나 예전에는 맹(盟)씨와 마(馬)씨가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송막골

큰말 남쪽 소반뎅이 근처 골짜기에 있던 마을로 지금은 없어졌으나 예전에는 송(宋)씨가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구삿터

내삼미 1동의 북쪽 마을인 양짓말인 서쪽 끝 모퉁이에 있었던 마을로 예전에는 구(具)씨들이 모여 살아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지형이 거북이 모양이라 구산(龜山)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외 내삼미 1동 지역에는 황새뿌리, 필봉산, 달래산 다다산, 반달산, 안달래산, 바깥달래산, 송장산, 주마산, 적곡산, 동안산, 큰산, 막재고개, 귀신재고개, 달봉재, 불릉고리 고개, 은산재, 신동이, 당터, 농바위, 투구봉 바위, 삼원수, 가재울, 수류곡, 농암곡, 옻우물, 찬우물, 웃우물, 아래우물, 소반뎅이, 금반향, 주마혈, 엄마무쟁이, 돼지뿌리, 활터, 산신제터, 한배미, 종달배미, 굴밖 등의 땅이름이 남아 있다.

 

한편 내삼미1동에는 밀양 당씨(唐氏) 시조묘가 있어 눈길을 끈다. 이지란과 같은 시대 사람인 당성(唐誠 1337~1413)이 바로 밀양 당씨의 시조인데 원래 당성은 고려 말기에 귀환한 중국인이다.

 

명나라 명주 사람으로 고려말기에 고려로 피란해 귀화했다. 율령에 밝았으며 전농시 판사가 된 후 사대이문을 맡았다. 조선시대에는 호-예-병-공조의 전서를 지냈고 공안부윤으로 치사했다. 밀양으로 향관을 주어 밀양 당씨의 시조가 됐다.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14-02-01 13:00:07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최근 많이 본 기사더보기
뉴스제보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