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오산에 전하는 신비한 옛 이야기들(40) - 이영주 기자, 구비전승47회 지명유래-남촌동③
  • 기사등록 2014-01-24 18:49:25
기사수정

【오산인터넷뉴스】궐리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궐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궐동 범위는 매우 넓어 오산천변의 북쪽을 경계로 남촌동으로 된 대호밭, 궁터도 궐리였다.

 

궐동 지명은 궐리사가 생기면서부터이기에 아주 오래된 마을이다.

 

남촌동의 세 번째 법정동 궐동 이야기를 전한다.

 

▲ 남촌동 세 번째 법정동인 궐동은 궐리사를 중심으로 형성돼 붙여진 이름이다.

 

■ 궐동

우리나라에 궐리사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당은 단 두 곳으로 하나는 오산의 궐리사이고 하나는 논산 노성 궐리사다.

 

‘궐리’란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 곡부 향리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오늘날 오산시 궐동 유래도 여기서 찾아진다.

 

궐리사는 공자의 가르침을 알리고 배우기 위해 설립된 공자를 모시는 사당이다.

 

처음 궐리사를 건립한 사람은 조선 중종 때 공서린(孔瑞麟 1458~1541)으로 공자의 64세손이다.

 

공서린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해 사우 앞뜰의 은행나무에 북을 매달아 두고 문하생들의 학문을 격려하고 독려했다고 한다.

 

그가 죽고 나자 이 은행나무도 자연 말라죽고 말았다.

 

그 뒤 정조 16년(1792) 10월3일 정조가 전교를 내려 궐리사를 다시 건립하도록 했다.

 

이듬해 4월 정당(正堂)과 동·서재가 준공됐다. 사우의 편액도 정조의 어서로 사액됐다.

 

이때 정조가 특명을 내려 궐리사를 건립하면서 은행나무를 다시 식수하도록 했다고 전한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궐리사도 훼철됐다가 1900년 사당이 중건됐고 이듬해 강당이 세워졌다.

 

1981년 강당이 중건됐고 1983년 중국 산동성이 기증한 공자의 석조석상이 안치됐다.

 

▲ 궐동 범위는 매우 넓어 오산천변 북쪽을 경계로 남촌동으로 된 대호밭, 궁터도 궐리였다.

 

 

* 구정촌(九井村)

궐리사가 있는 곳의 옛 명칭으로 구정말이라고도 했으며 근처에 물맛이 좋은 우물 아홉이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나 지금은 그 우물이 어디인지 확인할 수 없다.

 

* 대호밭

궐리였으나 남촌동에 포함된 마을로 예전에 대밭(竹田)이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마을 뒤의 생김새가 큰 호랑이(大虎) 머리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예전에 마을에 호랑이가 나온 적이 있었다고 하며 일설에는 마을의 생김새가 호랑이의 눈을 닮은 곳이 있어 붙여졌다는 설도 전한다.

 

1899년(광무 3)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는 대화촌(大花村)이라고 기록돼 있고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때는 죽전(竹田)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나무와 매우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일설에는 이곳 대호밭의 옛 지명이 상죽담이고 현 오산대학역 있는 곳이 바로 하죽담이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원래 죽담은 죽미의 옛 이름으로 내삼미동 죽미 마을의 옛 이름으로 죽담이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 궁터

예전에 궁(宮) 터가 있어 붙여졌다고 한다.

 

일설에는 마을의 생김새가 활 모양인 궁(弓)처럼 휘어져 있으면서 긴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또한 일설에는 활을 쏘는 활터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전해진다.

 

1899년(광무 3)에 발간된 ‘수원부읍지’에 의하면 초평면 궁기리(宮基里)가 나온다.

 

또 1914년 일제가 실시한 행정구역 개편 때는 초평면의 궁대(宮垈) 등의 명칭이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궁(宮)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곳에 궁이 있었다는 어떠한 기록도 없으므로 활 궁(弓)의 와전인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실제 마을의 지형이 활처럼 휘어져 있어 궁(弓)으로 표기하는 것이 마땅하나 마을의 유지들이 궁(弓)보다는 궁(宮)이 좋겠다 해서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편 궐동에는 옛날부터 연안 김씨, 광산 김씨, 곡부 공씨 등이 대성을 이루며 마을을 형성했으나 지금은 여러 성씨가 들어와 살면서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마을을 찾아보기가 거의 힘들다.

 

특히 대호밭에 사는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원래 장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는데 호랑이의 출몰과 관련해 모두 폐가해 이제는 장씨 집안 사람들을 볼 수 없다고 전하고 있다.

 

이외 궐동에는 삼태굴산, 된봉산, 장고개, 웃우물, 아래우물, 용수정, 바우배미, 길뚝배미, 넘어궁터, 건너궁터, 방아다리 개울, 문공산, 구정산, 안산, 노랑구리, 은행나무, 풍목골, 증산골, 석산골, 독골 등의 땅이름이 남아 있다.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14-01-24 18:49:25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최근 많이 본 기사더보기
뉴스제보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