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hong 기자
【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달러(dollar)야, 달러.”
미국 화폐(cent) 문양이 새겨진 금색포장지에 쌓인 500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더 큰 초콜릿을 내밀며 건네시는 말씀이 뚝뚝 끊어져 무심한 듯했으나 분명 그 속에 정이 담겼음은 여실했다.
산수(傘壽·80세)를 앞둔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무척 정정하고 기운찬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산시 공무원들이 직접 창립하고 운영하는 ‘오나리 야학’을 취재하면서 느꼈던 감동이다 .
▲ 오산시 공무원이 창립한 봉사단체 '오나리 야학' 과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집중하고 있다.
취재에 앞서 몇 달 전 발표된 2013년 제2회 검정고시 합격자 명단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퇴근하자마자 피곤한 몸으로 밤 늦도록 열심히 가르쳐 주는 공무원 선생님들을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노력해 다음 시험에 꼭 합격하겠다”고 다짐했던 그에게 끈기와 학구열은 누구도 쉽사리 흉내낼 수 없을 듯 보였다.
그가 사는 집은 초등학교 졸업사진 액자가 벽에 걸렸고, 그 옆에 빈 액자가 하나 더 있다고 한다.
거기에는 중학교 졸업 사진을 채워 넣으려고 준비해 둔 것이다.
그는 역사책에서나 봤음직한 만주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사정상 상급학교로 진학하지 못했다.
▲ '오나리 야학' 교실에 가득한 학구열로 강의실은 내내 훈훈했다.
반세기가 훌쩍 넘도록 이루지 못한 숙원의 벽을 이제 허물기 위해 그는 정진하고 있다.
오나리 야학은 2005년 당시 홍휘표 중앙도서관장이 창안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오산은 검정고시 학원이 없는지라 느지막히 공부에 뜻을 둔 만학도들은 그 길을 찾기 어려웠다.
큰 뜻을 품고 배우려 하더라도 인근 수원이나 서울로 발품을 팔면서 적잖은 수업료(50~100만원)를 내고 들어야 했다.
이런 사정이 안타까웠는지 오산시 젊은공무원 몇명이 뜻을 모았고, 그 때 이름 ‘청학골 야학’을 시작했다.
▲ 청출어람-제자가 스승보다 나음을 이르는 말. 오나리 야학이 열리는 중앙도서관 4층의 화초는 푸르렀다.
지금의 청학도서관에서 물꼬를 튼 것으로 초반 명칭은 ‘청학골 야학’이었다.
야학(夜學)은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한다’는 통상적 개념을 포함하는지라 청학골이라는 정겨운 명칭이 제법 어울리고 익숙한 듯 싶지만 중앙도서관이 건립되고 장소를 옮기면서 오산을 상징하는 ‘오나리’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모인 공무원 6명은 각자 과목을 맡아 하루 2시간씩 수업을 시작했다.
검정고시는 1년에 2회 치러지며 중학교 졸업은 6과목, 고등학교 졸업은 8과목을 응시하게 된다.
“이 시험은 학생을 붙이기 위한 시험이기에” 1차 시험에서 일부 과목만 합격했다면 다음 시험에서 나머지 과목들을 충당하는 제도로 운영된다고 한다.
그렇지만 몇 십년을 놓았던 연필을 다시 들고 책상앞에 앉기란 도무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것도 하루 두어시간을 매일같이 말이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논어)
배움의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다.
‘오나리 야학’ 학생들은 이 말을 뼛속에 새기지 않았을까 싶다.
2013년 8월22일 발표된 2013년도 제2회 검정고시에서 오나리 야학은 합격자 4명을 배출했다.
만학도 10명이 응시했고, 4명이 합격했다.
이들은 모두 환갑에 가까운 나이로 불과 1년만에 중·고 검정고시에 연이어 합격했다.
아울러 상반기 고입 검정고시 합격자 8명까지 더해 명실공히 명문야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야말로 연타석 장외 홈런이 아닐 수 없다.
이에 지역언론들은 앞다퉈 만학도들이 일군 ‘성공신화’를 보도하기 시작했고, 연이은 겹경사로 오산지역은 잔치만 열리지 않았을 뿐 축하의 메시지가 곳곳에서 진동할 정도로 회자되고 있다.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의지를 가감없이 보여 준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오나리 야학은 매년 5~6명 정도 합격자를 배출하고 있다.
오나리 야학에 고연령대 학생이 많다고 해서 나이에 제한받는 일은 없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정규학교를 자퇴한 학생들이 가끔 오기도 한다.
이들에게는 열정만큼의 지구력이 뒷받침되지 않기에 몇개월만에 중도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처음 오나리 야학의 문을 두드리는 이들은 “저어.. 제가.. 나이가 많은데요...” 하며 망설인다고 한다.
이러한 주저함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겠지만 해보면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다소 낯설 수 있으나 일주일만 지나면 서로 지짐이도 부쳐 드실 정도로 친하게 지내신다”며 유능하고 젊은 스승은 말한다.
보통 학생들이 어려워하는 과목은 영어와 수학이라고 한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국·영·수 중심의 학습’은 매일반인가 보다.
무보수에 주 1회 수업 봉사가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어떤 공직자 스승은 “한자라도 더 배우려는 이들의 모습에서 에너지를 얻는다. 공직에 몸담고 있는 한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이 있을 때까지 간부 공무원이 되더라도 계속 야학에 나가겠다”고 말한다.
아들 먼저 공부 시키고 ‘딸은 무슨 공부냐’며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던 만학도들.
학력이 낮으니 대우 좋은 직장을 잡기도 어려웠다.
결혼해서 초등학교 졸업이 아니라고 자신의 학력을 속여 자식의 ‘학교알림장’에 적을 때의 기분.
눈물을 가슴에 삼켜야 했던 그 감정들이 이제는 고등학교·대학교 동창들과 정담으로 승화된다.
오나리 야학 졸업생들은 이를 바탕으로 대학에 진학하고 동문회를 만들어 모임까지 갖고 있다.
“초반 1년은 수업자료 만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렇게 수업을 하면서 시간이 지났다. 초롱초롱한 눈망울 앞에 서면 일주일의 피로가 뿌듯함과 흐뭇함으로 사라진다.”
오나리 야학 창립 멤버이자 공무원 스승이 느끼는 보람이다.
한가지 더 기쁜소식이 있다.
얼마 전 공석된 자리에 강사 구인공고를 시청내부 공지에 띄었더니 10분만에 지원자가 몰렸다고 한다.
전공과 다소 차이가 나는 직무를 하던 공무원들이 자신의 전공을 살리면서 지적 재능기부를 통해 만학도들을 돕는 일에 많은 관심을 보인 것이다.
‘무언가에 늦었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라. 지금이 그 일을 이룰 수 있는 가장 빠른 시점이다’.
이 말에 가장 근사하게 어울리는 멋진 만학도들!
오나리 야학이다.
한편 오산중앙동서관 야학교실은 매주 월~금요일까지 4층 문화강좌실에서 오후 7~9시까지 진행되며, 희망자는 중앙도서관 사서팀(8036-6156)으로 문의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