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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아저씨의 이야기 보따리 - 제10편-겨울독서의 풍류·진미 ‘대하소설' 읽기
  • 기사등록 2013-10-19 11:4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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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 <열린책방> 책아저씨의 이야기 보따리

제10편-겨울 독서의 진미  ‘대하소설 읽기’

 

▲ 1930년대말 전라도 한 문중 이야기를 다룬 최명희 作, '혼불'.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야외활동이 봄·여름 같지 않은 요즘은 대하소설 한 질 쯤 겨울나기 응원군으로 준비해 둘 일입니다.

 

보온이 잘 된 온돌방에서 다리 뻗고 소설책을 읽는 재미는 계절의 풍류로 즐기는 맛이 괜찮더군요.

 

저는 최근 최명희 선생의  ‘혼불’ 전10권을 완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최명희 선생의 심혼이 담긴 유작으로 전라도 지방의 풍속과 언어가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라고 손님들에게 입소문을 내고 있었지만, 직업 핑계로 주마간산(走馬看山) 격의 벼락독서를 했던 탓에 자세한 내용을 풀어 대화라도 나누게 되면 밑천 짧음을 실감하고 뒷전으로 물러나곤 했는데 이번 만큼은 정독해 소원을 풀었습니다.

 

‘혼불’은 한(恨)이 중심이 된 소설입니다.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말기까지 어려운 역사속에 펼쳐지는  ‘이씨 문중 종가’를 중심으로 다뤄진 민초들의 이야기입니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한과 남정네들의 정에 외면 받은 여인들의 한, 상민들의 양반님들을 향한 오랜 세월 쌓아온 구원까지 한은 곳곳에 숨어 있다가 틈만 보이면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 이야기를 끌어갑니다.

 

남원골 매안 마을 이씨 문중 종가, 시할머니  ‘청암마님’슬하 손부로 시집온 새댁 효원은 신혼 첫날밤부터 남편에게 외면당하고 한을 품고 살지만 대대로 물려온 종가의 종부역을 잊지 않습니다.

 

일찍 청상이 되어 양자로 대를 이은  ‘청암마님’은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과 손자를 길러 종가를 잇게 하고, 쇠락해가던 가문의 기운을 되살려  ‘수천석지기’대농으로 명문가의 면목을 지켜냅니다.

 

이하  ‘매안의 문중’으로 불리는 양반가의 전통예의범절과  ‘거멍골’로 대표되는 상민들의 삶의 애환이 각기 사연으로 엮어져 숨가쁘게 전개됩니다.

 

나라를 빼앗긴 이 땅의 지식인들이 이민족의 압제에 저항한 기록과 물밀듯 몰려오는 신문물로부터 가문의 풍도를 지키려는 양반가 어른들의 고뇌 등이 이야기의 전개를 극적으로 만듭니다.

 

대갓집  ‘이씨 문중’에서 벌어지는 혼례·상례·제례 등의 행사가 전문서적 이상의 깊은 지식으로 상술되어 독자를 현장에 참석한 당사자처럼 감동에 빠지게 하고, 전라도 지방 고유방언이 적소에 구사되면서 대하소설을 읽는 진미를 맛볼 수 있음은 저자가 독자들을 위해 배려한 값진 선물입니다.

 

대하소설의 사전적인 의미는  ‘개인이나 가족, 혹은 한 무리의 생애가 오랜 세월에 걸쳐 펼쳐지는 규모가 큰 장편소설’이라고 합니다.

 

단대의 삶이나 사건을 극적으로 그리는 중·장편소설과는 달리 긴 시간의 역사를 그리기 때문에 개인사와 민족사, 혹은 국가사가 함께 전개되기 마련입니다.

 

앞서 언급한   ‘혼불’의 경우가 그러한데 민족의 역사·풍습·철학까지 다방면의 지식을 소설의 줄거리에 인용해 폭넓게 사건을 서술해가는 저자의 박력에  “과연!”하고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국내·외 작가들의 대하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낀 감상이지만 소설 쓰기는 역사를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합니다.

 

정사(正史)가 살피지 못하는 부분, 즉 민초들의 삶을 여과없이 그려 분식되지 않은 역사를 읽게 하는 효과야 말로 대하소설의 장점일 것입니다.

 

위에 예로 들은  ‘혼불’과 비슷한 연대기를 기록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박경리 선생의  ‘토지’와 조정래 선생의  ‘아리랑’이 있습니다.

 

이민족의 침입을 막지 못해 나라 잃은 국민이 된 민초들이 역사의 풍운속에 휩쓸려 들어 갖은 고초를 당하면서도 입지를 외치는 장면들이 각별한 감동을 주는 수작들입니다.

 

러시아 문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서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의 귀족문화와 전쟁으로 인해 겪는 민중의 고통 등을 읽고 탄식을 했습니다만, 우리의 대하소설도 역사와 연계된 민족의 시대상을 그린 경우가 많습니다.

 

‘혼불’과 ‘ 토지’ 와  ‘아리랑’이 그러하고, 춘원 이광수 선생의  ‘마의태자’ , 유현종 선생의  ‘연개소문’ , 이병주 선생의  ‘바람과 구름과 비(碑)’가 그러합니다.

 

박종화 선생의  ‘자고 가는 저 구름아’를 비롯한 역사대하소설 연작, 신봉승 선생의  ‘조선왕조 500년’ , 이환경 선생의  ‘태조 왕건’ , 김성한 선생의  ‘임진왜란’ , 김탁환 선생의  ‘불멸의 이순신’이 또한 그렇고 홍명희 선생의  ‘임꺽정’과 황석영 선생의  ‘장길산’ , 최인호 선생의  ‘상도’가 역사의 풍운에 휩쓸려 든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과 이병주 선생의  ‘지리산’ , 이문열 선생의  ‘영웅시대’와  ‘변경’ 연작, 김성종 선생의  ‘여명의 눈동자’가 분단조국의 비극을 여과없이 그려내고, 최근에 김주영 선생이 29년만에 마지막 권을 냈다하여 화제가 된  ‘객주’는 조선조 후기 보부상의 애환을 그린 대하소설인데, 선생의 경우 군도(群盜)들의 활약상을 그린  ‘활빈도’등 이색적인 작품이 많더군요.

 

현대사의 부조리한 면을 파헤친 작품으로 고원정 선생의  ‘빙벽’을 들 수 있고,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그린 황인경 선생의  ‘목민심서’도 빠트릴 수 없군요.

 

최인호 선생의  ‘유림’과 김정산 선생의  ‘삼한지’ , 이문열 선생의  ‘요서지’, 유현종 선생의  ‘천산북로’ , 김홍신 선생의  ‘대발해’ , 정동주 선생의  ‘단야’, 정비석 선생의 ‘손자병법’과 ‘김삿갓 풍류기행’등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명작들인데, 일개 헌책장사의 독서목록에서 찾는 우리나라 작가의 대하소설들만도 이러하니 직접 읽지못한 책까지 예로 들기로 하면 끝이 없겠네요.

 

앞서  ‘전쟁과 평화’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러시아 문학의 완역본은 대하소설 아닌 게 드물 정도로 풍성한 두께를 자랑하고, 미국·영국·프랑스·독일 등 서구제국의 작가들이 생산한 소위 명작소설들도 완역본일 경우  “과연!”하는 감탄사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양과 질에서 풍성함이 돋보입니다.

 

청소년용으로 축약돼 세상에 나온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나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 ,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 알렉산드르 뒤마의 ‘몽떼 크리스또 백작’을 읽고 우쭐대던 아둔패기가 완역본을 다시 대할 때의 감상은 신대륙의 발견과 필적할 벅찬 감동이었습니다.

 

이웃나라 중국과 일본의 대하소설로 필독도서 목록에 오른 책들도 종류가 대단합니다.

 

중국 고전의 경우 소위 4대 기서라는 삼국지·수호지·서유기·금병매를 비롯해서 홍학(紅學)이라는 학문분야를 만들어냈다는 조설근의  ‘홍루몽’ , 한고조 유방과 초패왕 항우의 천하쟁패전을 그린  ‘초한지’ , 지괴소설의 대명사 ‘요재지이’ , 신선과 요괴의 쟁패전을 그린  ‘봉신방’등 우리가 익히 알던 제목의 책들이 많습니다.

 

예전에 소개해 드린적이 있는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을 비롯한 일본산 대하소설 역시 국내에 번역된 게 적지 않은데, 요시카와 에이지, 시바 료타로, 시바타 렌자부로, 사사자와 사호 등 일본의 유명 작가들이 여러 가지 버전으로 쓴  ‘미야모토 무사시’는 우리말로 모두 출판됐고, 에도시대 무사의 복수극을 그린 모이무라 세이치의  ‘충신장(忠臣藏)’과 명치유신의 주역 사카모도 료마의 전기를 그린 시바 료타로의  ‘료마가 간다’ , 러일전쟁사를 그린 ‘언덕 위의 구름’도 시중 서점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일본이 세계 최초의 소설로 자랑하는 ‘겐지모노카다리(源氏物語)’는 서양에서도 고전으로 대접을 받는 명작인데, 호머의 ‘오디세이·일리아드’, 중세 영국의 고전‘베오울프’, 프랑스의 기사 무훈담 ‘롤랑의 노래’ 등이 서사시 형식으로 쓰였다니 일본인들이 긍지로 삼는 ‘겐지모노카다리’의 세계 최초 소설 운운은 옳은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책은 읽는 이의 지적수준과 연륜에 따라 감동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굳이 어려운 학술서적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재미있게 읽었던 소설류가 특히 그러한데 재차, 혹은 수삼차 읽는 독서에서 젊은날 읽을 때는 볼 수 없었던 장면을 발견하고 새삼스레 개안했음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나이가 많아지면서 한(恨)을 이해하는 눈이 밝아진 탓이라고 풀고 싶은데, 나이 쉰을 일컬어 지천명이라고 부르고 예순을 일컬어 이순이라고 부르는 뜻과 일맥 통한다고 하겠습니다.

 

저는 소설을 읽는 이유 가운데 한풀이의 대리만족이 포함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주 오시는 어르신들 가운데 한 분의 가족사를 우리나라 근현대사에 대입해본 결과인데, 일제의 압제에서 만학으로 어렵게 공부하신 그 어르신은 6·25전쟁의 와중에 피해를 입고 야인으로 일생을 사셨다고 하였습니다.

 

어르신의 인생사는 어떤 소설속의 주인공보다 한의 크기가 작지 않은 절박한 이야기의 연속이었고, 어르신이 주로 읽는 책은 앞서 예로 들은  ‘혼불’과 ‘토지’, ‘객주’, ‘단야’ 와 같이 한(恨)과 정(情)이 어우러진 대하소설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 대하소설이 한의 문학이라는 말을 되풀이했습니다만,  ‘혼불’과 ‘토지’가 반가(班家)의 안주인을 주인공으로 하여 무너지는 반상의 법도와 상민들의 신분상승 욕구를 아울러 그리고 있다면, 정동주 선생의 ‘단야’에서는 아예 최하층 천민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천민과 나란히 살아야하는 세태를 탄식하는 몰락 양반의 한(恨)이 그려지고 있었습니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역시 정동주 선생의  ‘백정’은 신분끼리의 충돌이 더 극적으로 나타나 있다고 하니 기회가 닿으면 정독해 보겠습니다.

 

2013년 올해도 노벨문학상은 우리나라 작가들을 외면했다고 합니다.

 

독서목록 속의 대하소설들을 차례로 들추면서  “하나같이 외국의 소위 명작소설에 못하지 않은 걸작들인데…”하고 아쉬워했습니다.

 

아직 읽지 못한 책들이 있거든 이 겨울에 꼭 독파하세요.

 

 ‘문학이 죽었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만, 가장 큰 원인은 ‘써도 읽어주지 않는’ 독자들에게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출판계의 어려운 실정은 말씀드리지 않아도 모두 아시겠지만, 독자들이 책을 구입해 읽어야 출판업자들도 살고 노벨문학상도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앞서 얘기한 ‘백정’과 함께 아직 읽지못한 책으로 송기숙 선생의 ‘녹두장군’이 있는데, 이 겨울에 작정하고 반드시 구해서 읽을 각오이니 여러분들도 좋은 독서로 뜻 깊은 한해를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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