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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 <열린책방> 책아저씨의 이야기 보따리

우리 역사읽기 필독서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

 

▲ 1145년쯤 김부식 등이 고려 인종의 명을 받아 편찬한 삼국시대 정사 삼국사기.

 

요즘 역사 교과서 개편 문제로 말들이 많더군요.

 

▲ 1281년쯤 고려 후기 승려 일연이 편찬한 사서 삼국유사.

 

2014년부터 배울 고등학교 교과서 8종이 검인정을 통과했는데, 그 가운데 일부가  ‘지나친 우편향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는 겁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교육하는 일은 어른들의 당연한 의무이니, 지금의 소란은 우리 사회가 건전한 비판의식을 가졌다는 증거라고 생각됩니다.

 

제 책방에 오시는 손님들 중에도 역사에 관심이 가진 분들이 계셔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이번에 논란을 만든 역사교과서 집필자들의 성향이 의심스럽다는 분들과 기존 역사 교과서에도 문제가 있다는 분들이 고루 계셔서 우리 보통사람들의 의식 깊이를 확인하는 유익한 시간이 됐습니다.

 

제가 이 난에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읽기를 권하는 이유는 그런 경과 때문입니다.

 

어떤 손님이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선생의 말씀을 전하며 교훈을 주셨던 것입니다.

 

“소위 정사(正史)인 삼국사기가 체례(體例)를 정제하기 위해 문사(文辭)를 화려하게 하고 괴란(怪亂)을 피해 국고(國故)의 원형을 왜곡한 점은 잘못이다. 국의적 고사(國義的古史)를 찾아보기 어려운 삼국사기보다 원형적 옛 전설과 설화를 자유롭게 서술한 삼국유사를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후손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려는 노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찬술된 옛 고려조 때부터 최남선 선생이 역사를 연구하던 일제 치하의 어려운 시대까지 변함없이 이어져 왔으니, 후손된 우리로서는 문화민족으로서의 자부심을 지켜 역사를 왜곡하는 일 따위는 없어야한다고 경계하신 것이었습니다.

 

삼국사기는 고려 인종23년(1145년)에 완성된 정사입니다.

 

전형적인 기전체(紀傳體) 사서로 삼국의 본기(本紀) 28권, 연표(年表) 3권, 지(志) 9권, 열전(列傳) 10권으로 제1 신라본기부터 제50 열전 궁예 견훤 편까지 총 50권입니다.

 

저자는 김부식(金富軾)을 비롯한 학자 열 한 분인데, 국책사업이었던 만큼 일정한 방침에 따라 일관되게 기술됐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구삼국사(舊三國史)라는 사서가 있었고, 옛 고구려의 유기(留記)와 백제의 신집(新集),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도 일실되지 않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관찬(官撰)인 삼국사기는 우리의 옛 사료뿐만 아니라 중국의 후한서(後漢書), 진서(晉書), 남북사(南北史), 수서(隨書), 신구당서(新舊唐書) 등의 사료들을 풍부히 인용하고, 삼한고기, 해동고기, 신라고기, 화랑세기 등의 우리 유적(遺籍)들도 적절히 참고해 지금은 실전된 고기록들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삼국사기는 열전의 김유신 편에 세 권의 분량을 할애하는 등 신라 편중의 기록 방식이 지적되고 있는데, 사료를 구하기 힘들던 당시에 상술된 김유신전이 후손에 의해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려의 국통(國統)을 고구려의 후신에서 신라의 적통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삼국통일을 정당화하려는 의도였다는 말씀하시는 분도 계셨는데, 저는 전자의 의견에 찬표를 보내고 싶습니다.

 

신라의 삼국통일은 나라의 경계를 대동강 이남으로 고착시킨 결과이니 통일이 아닌 개악이라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삼국사기가 발해사를 외면하고 중국에 대한 사대모화사상(事大慕華思想)을 전파하는데 역할이 컸다고 폄하하고, 국책의 변경으로 이설이 된 사서들을 훼손한 원인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삼국사기를 읽으며  “옳으신 말씀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하는 감상을 품게 하는 부분을 여러 곳 발견했는데 여기에 옮겨봅니다.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鈔擊, 述等且戰且行,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우문술 등이 방진을 치면서 행군하니 우리 군사가 사면에서 그들을 초격하였다. 우문술 등은 싸우며 달아나며 하여, 7월에 살수에 다다라 수나라 군사가 반쯤 강을 건너려 할 때 우리 군사가 후군을 치자 적의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고 수군이 모두 붕궤하여 걷잡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高麗 百濟 全盛之時, 强兵百萬, 南侵吳越, 北撓幽燕齊魯, 爲中國巨蠹

 

(고구려 백제가 전성하였을 때는 강병이 100만 명이어서 남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범하고 북으로는 유(幽) 연(燕) 제(齊) 노(魯)를 흔들어서 중국의 큰 두통이 되었으니…)

 

위는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편에 나오는 을지문덕장군의 살수대첩을 기록할 때의 문장이고, 아래는 열전 제6 최치원 편에 인용된 최치원문집 중의 일절입니다.

 

저는 이 기사들을 보면서 을지문덕장군의 승전보를 전할 때 우리(我) 군사의 승리를 강조하기를 겹으로 하며 흥겨워한 사가의 표정이 눈앞에 보이는 듯싶었고, 최치원의 문장을 인용한 형식을 빌려 선대 두 나라가 콧대 높은 중국을 정벌한 역사를 기록하며 자부심에 눈빛을 빛냈을 선인들의 표정이 눈에 선하여 혼자 즐거워했습니다.

 

위의 기록 외에도 삼국사기가 중국에 대한 모화사상 일색이 아님을 알려주는 사료는 신라본기 제7권에 보이는 대당 항쟁사 등 많은 곳에서 발견됩니다.

 

세간에 문제로 지적받는 사대주의는 중국 땅에 강력한 통일정권이 섰을 때 소국이 국체를 유지하기 위해 차용한 방편이었다고 감히 변호를 해 보는데, 틀린 생각일까요.

 

삼국사기에 대비되어 읽히는 삼국유사는 국존(國尊) 일연스님이 쓰신 야사로 사기가 편찬된 해로부터 약 150년 후에 엮어졌다고 합니다.

 

어떤 책에서 삼국유사를 일사 유문적(逸事遺聞的) 사서라고 기록한 것을 본적이 있는데, 사실 외적인 신화와 설화까지 고루 포함하고 있는 데서 나온 분류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삼국유사는 왕력(王曆), 기이(奇異), 흥법(興法), 탑상(塔像), 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의 5권 9편목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삼국사기의 편제와 비교해 보면 왕력과 기이는 본기와 연표에 해당하고 탑상은 지(志)에 흥법과 효선 등은 열전에 놓을 수 있겠습니다.

 

편술자의 의도가 작용한 곳이 많아 육당 최남선선생은 ‘찬자를 중심으로 한 사벽(史癖)의 일유흔(一留痕)’이라고 하셨는데 지나치지 않은 평이라고 생각됩니다.

 

삼국유사에는 삼국사기가 놓치거나 일부러 지나친 사실들을 밝혀내어 기술한 흔적이 많습니다.

 

삼국사기의 보충 내지 보완의 뜻으로 찬술된 셈인데, 이는 기이 편의 서두에 기록된 다음의 일절에서 그 성격을 살필 수 있습니다.

 

然則三國之始祖, 皆發乎神異 , 何足怪哉, 此紀異之所以漸諸篇也, 意在訴焉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비스럽고 기이한 데서 나온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 기이 편을 모든 편의 첫머리에 싣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국의 대표적 사서로 사기(史記)에 기록된 삼황오제의 설화에 상당하는 우리의 신화시대 역사를, 소위 정사인 삼국사기가 괴이함으로 치부하고 버린 데 불만을 품고 구태여 기이편의 첫째 편에 수록하는 뜻을 민족의 주체적인 역사를 기억하려는 의도적인 편찬으로 명시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해설한 편저자의 글을 읽고  ‘뿌리 없는 나무는 없다’는 교훈을 본 듯 해 자못 엄숙한 기분이 되었습니다.

 

이렇듯 주체성을 갖고 시작한 삼국유사의 첫 번째 편은 고조선의 건국 이야기입니다.

 

삼국사기가 BC57년 신라 건국을 우리 역사의 시작으로 보는 데 비해 중국의 요(堯)임금 시대를 건국의 시점으로 보는 삼국유사의 이념은 역사를 보는 시각 자체를 한결 통쾌하게 만들어 줍니다.

 

환웅천왕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 신시(神市)를 여신 이후 시작된 우리 민족의 신화는 100일 고행을 이겨 낸 곰이 웅녀(熊女)로 변해 단군왕검을 낳은 고사로 이어져 본격 역사의 탄생을 낳고, 아사달에 도읍하신 단군왕검의 1500년 치세 후에 위만조선의 찬탈로 역사가 이어집니다.

 

이하 부여족의 나라들과 말갈 발해 5가야의 역사와 고구려 신라 백제의 건국에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역대 임금들의 치세와 그에 연한 설화들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흥미로운 읽을거리로서 계속됩니다.

 

최남선 선생은 삼국유사를  “민족 고래의 신전(神典)이요, 예기(禮記), 신통지(神統志), 설화집, 고시가집(古詩歌集), 불교사의 재료, 일사집(逸史集)”이라고 푸시고 고대사의 원천이자 백과전림식 민족서사시로 정의하셨다고 합니다.

 

실제로 삼국유사에는 사서로서의 기록 외에 50여권의 실전된 고기록이 인용되고, 도솔가(兜率歌) 등 향가 14수와 불교설화가 다수 수록되는 등으로 문화사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했습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교훈을 얻기 위함입니다.

 

저는 사서(史書)의 기록은 사실의 나열 외에 기록자, 혹은 번역자의 주관이 개입되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주의인데, 삼차 사차 사료로 재편집되는 과정에서 과거사의 잘 잘못을 가려 실수에 대한 교훈을 남기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의 편찬 방향에 만족치 못한 반작용으로 찬술되었다는 주장이 있는데, 그런 이유로 상호 보완의 의미가 되니 더욱 함께 읽어 숨은 뜻을 살펴야 한다고 하더군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그 시대 유(儒) 불(佛)의 최고 지성이 심력을 다하여 만든 역사기록입니다.

 

시대적인 사정 때문에 다소간 서운한 점이 있다고 하여도, 후손된 우리는 그 이유까지 살펴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역사교과서의 편찬이 좌편향 우경향의 시빗거리가 되는 이유는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여러 성향의 교과서가 나온다는 건 다양한 주장이 존재하는 문화민족임의 증명일 터인데 역사를 왜곡하는 일을 허용할 수 없지만 무작정 상대를 배척하고 자기류의 목소리만 높이는 일도 지양해야 할 것입니다.

 

이상의 연유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읽어 주십사 감히 권해 보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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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3-09-22 18:4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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