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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시의 전설

 

운암들 이야기

아주 오랜 옛날에는 오산천에 제방이 없어 장마만 지면 물이 범람하여 농사에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그러나, 제방을 쌓을 수 있는 능력이 없어 고민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길을 지나던 과객이 금암리 어느 진사의 집에서 식객 노릇을 하게 되었는데, 과객은 구척장 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더니, 과객이 며칠 동안을 무위도식하며 지내다 하루는 진사에게 신세를 많이 졌으니 도와드릴 일이 없냐고 물어 진사가 오산천 범람에 대해 말하니 과객은 딱한 사정을 듣고는 내가 제방을 쌓아 줄테니 몇 월 며칠 보름날까지 큰 가래를 하나 준비하고 통돼지 일곱 마리와 술 일곱 동이를 준비해 달라고 하였다. 진사는 어이가 없었으나 과객의 인물됨이 보통 이상이라 사람을 시켜 수원 광교산에서 큰 물푸레나무를 하나 베고, 수원의 대장간에서 큰 가래 삽을 만들어 소로 끌고 오산으로 왔다. 약속한 날짜에 과객은 하루 종일 낮잠을 자고는 저녁에 일어나 진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부터 일을 시작하니 마을 사람들에게 말하여 아무도 밖에 나오지 말아달라고 일렀다. 진사가 그렇게 하겠다고 약조는 하였으나 너무 궁금하여 마을 주민들과 몰래 숨어서 과객의 하는 짓을 보니 과객은 그 큰 가래를 한 손으로 들고는 오산천에서 일을 하는데 개천의 바닥의 흙과 모래를 떠서는 왼쪽에 쌓고, 또 떠서는 오른쪽에 쌓으니 순식간에 제방이 되었다. 한참을 그렇게 일을 하더니 통돼지 한 마리에 술 한 동이를 마시고 이런 식으로 제방을 쌓는데 새벽이 되어 동이 틀 무렵에는 오산천의 제방이 다 쌓엿다고 한다. 밤새 숨어서 구경을 하던 진사와 사람들은 피곤하여 새벽에 집으로 들어가 잠을 자고 일어나니 오산천의 제방이 완성되어 맑은 시냇물이 흘렀다. 한편, 과객은 밤새도록 오산천의 제방을 쌓는 일을 마치니 동녘에 붉은 해가 떠올라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진사에게 떠나겠노라 인사를 드리니 진사를 비롯한 주민들이 사례를 하고자 하였으나 사절하고 유유히 한양을 향해 길을 떠났다고 한다. 그때까지 이름을 모르던 주민들은 과객에게 이름을 물었으나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객이 오산을 떠나 한양을 향해 화성군 동탄면 미륵뎅이를 지나 영천리로 가다가 길 가운데 나무 두 그루가 있어 체격이 크고 몸집이 좋은 과객을 가로막자 돌아가지 않고 나무를 뿌리째 뽑아 놓고는 그 나무에다 [운암벌목(雲岩伐木)]이라 써놓아 주민들이 그때서아 그 과객의 이름이 운암인 줄 알게 되었고 그에 대한 고마운 마음에 그때부터 오산천변의 들을 운암들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리가 있는가. 결국 그짓을 계속하니 집안의 가세가 기울고 패가가 되었다고 전한다.

 

내삼미 이야기

어느 날 정조대왕은 원삼(源三)에 대령하고 있는 수원 유수(留水)를 불러, 이곳 고을의 이름을 물으시니, [문시백 송산림]이라고 아뢰니, 대왕께서 문()에는 필()이 있는 법이니 필봉(筆峰)이라 고쳐라 하시었다. 그 후에 또다시 대왕께서 능행차를 하실 때에 다시 수원 유수에게 고을 이름을 물으시니 문시백 필봉동이라 아뢰니 왕께서 이곳 사면 주위를 관망하시고는 "송산골은 금로대송(錦老大松)이 울창하여 아름답고, 점이골(현재의 죽미령)은 대나무골과 대량골에 대나무가 아름다우며, 문시와 오미의 오동나무가 아름답구나. 이제 이곳을 삼미(三美)라 칭하라" 하시어 삼미가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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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1-07-22 18:0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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