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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아저씨의 이야기 보따리 - 제8편-절판으로 더 빛나는, 법정스님 ‘무소유’
  • 기사등록 2013-08-21 18: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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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 <열린책방> 책아저씨의 이야기 보따리

제8편-절판으로 더 빛나는, 법정스님 ‘무소유’

 

▲ "중요한 건 안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이라고 말하는 법정 스님 수필집 '무소유'.

 

난(蘭)을 아끼는 마음에서 집착을 읽은 법정스님의 수필집  ‘무소유’는 많은 분들이 소유한 책입니다.

 

이 책만큼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낸 책도 드물고, 이 책만큼  ‘무소유’하기에 안타까운 책도 드뭅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처럼  “무소유를 이야기 하셨지만 이 책만큼은 소유해야겠다”일지도 모릅니다.

 

며칠 전 한 손님이  “무소유를 샀다”고 하시며 비슷한 제명의 책을 두 종류 가져오셨습니다.

 

무소유는 저자인 법정스님이 열반하실 때에 절판시킨 걸로 아는데 무슨 말씀인가하고 봤더니, 가판용으로 만든 문고본들로 덤핑 냄새가 짙은 다른 책들이었습니다.

 

스님이 열반하실 때 출판업자들이 “기회다!” 하고 찍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고 회수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으므로 그런 종류의 책이겠다 싶어 내용을 읽어보았더니 뜻밖에 글들이 좋았습니다.

 

저자의 이름을 감춘 책도 있기는 했지만 교수 명색의 저자가 이름을 내세우고 있는 책도 있어서 ISBN(국제표준도서번호)을 검색해 보았더니 두 권 모두 도서번호가 등록돼 있지 않은 유령서적으로 나오더군요.

 

갈데없는 짝퉁이라서 손님과 더불어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책의 내용이 충실했다는 점인데, 저자의 이름을 감춘 책의 경우 법정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내용으로 한 권의 읽을거리로서의 가치가 충분해서 ‘가판용이라니 안타깝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무소유를 빌어 매명(賣名)에의 집착을 보인 짝퉁들을 접한 후 법정스님의 책들을 새삼스레 다시 읽어봤습니다.

 

‘무소유’ , ‘일기일회’ , ‘서있는 사람들’ , ‘산에는 꽃이 피네’ ,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등등……. 스님의 유언으로 절판된 책들이기 때문에 큰 서점들에서도 구할 수 없는 희귀본인데, 헌책장사로서의 수집벽 때문에 읽을 수 있었으니 직업의 덕을 입은 호사를 한 셈입니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출간하지 말아주기를 간곡히 부탁한다.”

 

책을 절판토록 하신 스님의 말씀인데, 구태여 다시 읽는 무소유는 전날 이상의 감동을 줬습니다.

 

짝퉁 책을 사온 손님과 더불어 책들을 펼쳐놓고 스님이 수필집 무소유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뜻을 피력하면서  “인간의 역사를 소유사에서 무소유사로 그 향(向)을 바꾼다면 싸움 따위는 없어질 것이다”고 하신 스님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었습니다.

 

이 글은 이상의 사건을 빌미로 법정스님의 저서들을 읽은 감상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기왕의  “읽어 주십사”와는 같지 않고  “이런 내용의 글들이 실려 있습니다”임을 말씀드리면서, 가장 자신 있게 읽은 ‘무소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해 보겠습니다.

 

무소유의 배경은 1960대 말부터 1970년대 초입니다.

 

경제대국의 기초를 닦던 시기로 건설열풍이 전국을 휩쓸던 때였는데, 무리한 강행군의 와중에 빚어진 부조리가 적지 않아 뜻있는 이들의 염려를 사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무소유에는 부와 권력을 소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교훈의 말씀이 많습니다.

 

“오늘 우리 현실은 개인의 기본권이라 할지라도 국력의 총화를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유보(留保)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수 계층만이 즐기는 취미는 사회적 계층의식을 격화시켜……”

 

당시는 소위 유신의 시대, 스님은 나날이 골이 깊어가는 계층 간의 갈등을 탄식하시면서도 정작 당신은 가장 질박(質朴)한 삶을 사시며 “오늘 나의 취미는 끝없는 인내다”라고 수도자다운 항변을 하십니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선택한 가난은 부보다 훨씬 값지고 고귀한 것이다.”

 

부유함보다 값지고 고귀한 가난, 스님은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 통치 하에 있던 인도의 성자 간디의 말씀을 빌려 수필 ‘무소유’의 서두에 정의를 내리십니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腰布)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評判), 이것뿐이오.”

 

물레는 직접 옷을 지어 입어 지배국 영국의 공업력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저항의 상징이었고, 요포는 허리를 덮을 수 있는 간단한 포대기를 말한다니, 최소한의 의식주에 소용되는 물건과 세상 사람들의 세평(世評)만이 재산의 전부였던 마하트마 간디를 이상으로 모신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합니다.

 

수필 ‘무소유’는 다섯 쪽 남짓의 짧은 글에 그처럼 깊은 의미를 심은 글입니다.

 

스님은 ‘얻어 기른 난(蘭)에의 집착으로 불승으로서의 본분을 잃었다. 모든 것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이고 스쳐 지나가는 것을 잠시 맡아두고 있을 뿐인데, 내 소유라고 생각하고 마음을 빼앗겼다’고 후회하고,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逆理)이다’로 결말을 맺습니다.

 

어떤 글에서 ‘법정 스님이 말하는 무소유의 의미는 실질적 소유에의 집착을 내려놓는 의미도 있겠지만, 결국 얽매이는 종속적 인간에서 탈피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는 풀이를 읽고, ‘참 자유는 자신 안의 욕심에서 벗어난 어떤 경지임을 설명하신 게 아닐까’하고 짐작해 봤습니다.

 

‘무소유’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기의 풍경을 담백한 문장으로 그립니다.

 

한강 줄기 뚝섬 나루의 뱃사공이 등장하고, 십 리 이십 리 길은 으레 걸어 다니던 시절의 가난한 농촌 풍경이 등장합니다.

 

장화 없이는 다닐 수 없는 흙탕길이 구시대의 상징으로 남아 있는가 하면, 수직공간이 있을 뿐 평면공간이 없는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해 법정스님을 비롯한 산중 사람들을 괴롭게 합니다.

 

갑자기 신분 상승한 ‘특수계층’이 서민들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골프를 취미로 갖기 시작하고, 예의 특수계층의 횡포에서 비롯된 부조리 고발과 독재에 저항하는 양심세력이 수난을 받던 어지러운 역사의 기록도 가감 없이 그려집니다.

 

군부독재의 어려웠던 시절, 천성이 의기에 넘치던 스님은 가난한 사람과 약한 사람을 편들어 권력의 미움을 삽니다.

 

불일암에 홀로 거하시는 스님을 사찰형사들이 주야로 감시하고 우편물을 검열하기도 하는데, 스님은 지인에게 ‘법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말씀하시어 감시 또한 낙으로 바꾸시는 달관의 경지를 보여 주십니다.

 

무소유는 삶의 이야기들을 주로 한 수필집이지만 불승인 스님은 종교 이야기를 빠트리지 않습니다.

 

당시는 정권의 의도적인 부채질로 종교 간의 갈등이 심하던 시절이었는데, 스님은 “이웃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면 그대로 있지 못하는 게 보살의 생리…”라든가, “이웃이 부처이고 예수이고 천주이다.

 

불교를 배우는 것은 자신을 배우는 것, 자신을 배우는 것은 자신을 텅 비우는 것…”등의 말씀으로 불교의 자비와 기독교의 사랑이 한 가지임을 가르치십니다.

 

“예수와 불타가 만나면 서로 공격할까?”라는 화두를 던지는 것으로 맹목적인 광신주의자들에게 일침을 놓으신 일화도 스님의 가르침 중에서 빠트릴 수 없는 내용입니다.

 

스님은 송광사에 속한 암자 불일암에서 17년을 거하시며 글을 쓰시고 설법을 베풀어 불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은 스님이 불일암에 붙인 다른 이름인데,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작품 ‘萬里靑天 雲起雨來 公山無人 水流花開 (가없는 하늘에 구름 일고 비 오는데, 빈 산에 사람 없어도 물 흐르고 꽃은 피나니)’의 인용이라고 했습니다.

 

구름일고 비오는 세상에 오직 물을 흐르게 하고 꽃을 피우기 위해 사신 스님의 일생을 짐작케 하는 글인 듯싶어 엄숙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법정스님의 속명은 박재철로 전남 해남이 고향입니다.

 

24세 되는 해에 효봉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하고 5년의 행자생활 끝에 비구계를 수계합니다.

 

그 뒤  함석헌 선생과 함께  ‘씨알의 소리’를 발행해 민주화세력의 소리를 대변하고 유신철폐운동에 참여하는데, 인혁당 사건으로 여덟 명의 양심수들이 사형을 당한 것을 계기로 불일암으로 돌아가 17년을 수행하십니다.

 

이 시기에 스님은 많은 책을 집필하시는데, 무소유도 그 중 하나입니다.

 

수필집  ‘무소유’는 1976년에 출간된 책입니다.

 

절판될 당시까지 370만부가 팔린 걸로 보도가 됐는데 스님은 출판사에서 받은 인세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셨다고 합니다.

 

말년에 길상사에 계실 때의 법문 가운데  “내가 신병 치료를 위해 부득이 사중의 돈을 빌려 썼다가 이제야 갚는다”고 말씀하실 만큼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사용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법정스님의 스승이신 효봉스님은 한국 불교계의 거봉으로 해방 후 일본식 불교를 몰아낸 공로자라고 하셨습니다.

 

출가하기 전에 식민지 조선 최초의 판사이셨는데, 평양법원에 계실 때 조선인 독립지사들을 법정에서 대한 후 ‘인간에게 다른 인간을 심판할 자격이 있는가’의 회의를 품고 방황하시다가 금강산 유점사에서 출가를 하셨다고 합니다.

 

효봉스님의 문하에서 법정스님을 비롯해 많은 고승이 나오셨는데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쾌사라고 할 것입니다.

 

1992년 법정스님은 강원도 산골의 오두막으로 수행 장소를 바꿉니다.

 

불일암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스님의 청정생활에 짐이 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무렵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를 창건하시는데,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알려진 김영한 보살의 요정 대원각 시주를 받아들인 결과였습니다.

 

이후 법정스님은 2010년 열반하실 때까지 강원도 산골의 오두막과 길상사를 오가시면서 많은 법문을 하십니다.

 

이때의 기록은  ‘일기일회(一期一會)’로 엮어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이번에 법정스님의 책들을 다시 읽으며 강가의 조약돌처럼 사신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에 씻기고 또 씻겨서 자연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인 계란형이 됐지만, 그걸로 보는 이의 즐거움이 될 뿐 스스로 취하는 건 아무것도 없는 담백함…….

 

수필집 무소유 중에 나오는 문장 중의 한 절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인 것을’을 차용해 감히 스님을 표현해 본 것입니다.

 

“새 옷으로 갈아입으려면 우선 낡은 옷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모든 길과 소통을 가지려면 그 어떤 길에도 매여 있지 말아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안락한 삶이 아니라 충만한 삶이다.”

 

무소유를 새롭게 읽은 후 가장 크게 각인된 스님의 말씀입니다.

 

‘무소유’는 워낙 뜻이 깊은 수필집이라서 서툰 소개말로 스님께 누가 되지나 않았는지 걱정이 깊은데, 미욱한 사람의 철부지 행동으로 이해하시고 부족하나마 기쁘게 읽어주셨다면 더한 다행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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