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hong 기자
【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은 일명 ‘펀치볼(Punch Bowl)’로 불린다.
6·25 한국전쟁 격전지로 정식 명칭은 해안분지(亥安盆地)다.
이 곳이 화채그릇을 뜻하는 펀치볼로 불리는 건 6·25 전쟁때 외국 종군기자가 인근 가칠봉에서 내려 본 모습이 비슷해서라고 한다.
해안면 주민들은 6·25 직후 이 곳으로 이주해 왔다.
민간인통제구역(民間人統制區域-비무장지대에서 남방한계선 5∼20㎞ 밖 민간인 통제선까지 구역) 근방에 위치한 이 마을은 한국전쟁 뒤 전시용으로 구성됐다.
당시 지뢰밭이나 다름없었던 이 곳에 정부는 북한을 의식한 전시용 마을을 조성하기 위해 입주하는 주민들에게 무조건 토지를 주겠다고 선전한다.
이 말을 믿은 주민들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마을을 형성했다.
그러자 원래 토지주들이 나타나 소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해안면 주민들을 보호해 주지 못했다.
손발에 피를 흘리며 가꿔 온 땅을 내주고 이들은 소작농이 된다.
이들을 또 괴롭힌 건 고엽제였다.
미국은 1962~1972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고엽제 1천900만 갤런을 사용했다.
남한 역시 엄청난 양의 고엽제가 반입됐다.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 각 2km의 비무장지대 시계(視界)를 좋게 하기 위해 군인들은 고엽제를 사용했고 농민들도 함께 사용했다.
그 결과 엄청난 독성에 시달리는 사례를 낳았다.
고엽제는 다이옥신 성분이 함유 돼 인체에 흡입될 경우 5~10분이 지나면 각종 암과 신경계 마비를 일으키는 것으로 보고됐다.
한국전쟁 직후 해안면 주민들의 삶은 이러했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는 초기 기지촌으로 형성됐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한 파주시에 미군 기지가 조성되면서 얻게 되는 효과는 분명했다.
기지가 들어서고 경제적 이유 등으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됐다.
이 과정에서 기지 중심 경제로 인권문제가 대두되기도 했다.
주민들은 논이나 밭에서 일하다 지뢰를 밟았다.
생존한 지뢰 피해자 20명 정도가 이 곳에 거주하고 있다.
군사훈련장이 위치했기에 많은 양의 탄피가 땅 속에 묻혀 중금속 오염을 유발했으나 미군은 기지 철수시 복구하지 않았다.
소파협정(SOFA 주한미군의 법적인 지위를 규정한 협정)은 복구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기지촌의 집약 형태를 보여주는 곳이다.
또 이 곳은 인민군과 중공군 묘역도 있다.
외로운 타지에서 단말마(斷末魔-인간이 죽을 때 느끼는 최후의 고통)
를 내지르며 죽어 간 그들의 유해를 모아 무명묘지를 조성한 것이다.
묘역은 그리 넓지 않으며 8월 여름 풀로 뒤덮여 있었다.
강원도 철원군 마현리는 민통선지역이다.
여기에 입주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1960년 마찬가지로 전시용 마을을 형성하기 위해 주민들을 이주시키고 세운 것이다.
민통선마을 주택은 1주택 2가구로 지어졌다.
이유는 보안이다.
하나의 벽을 사이에 두고 살며 이웃의 언행을 의심하고 감시하며 살았던 것이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한은 웃지 못할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1992년 5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1천242m 고도 가칠봉 정상에서 열린 ‘미스코리아 대회’ 수영복심사다.
이는 남·북한의 심리전으로 산 정상에 수영장을 설치하고 대회를 진행했다.
가칠봉은 금강산 제4봉이며 군사분계선까지 725m 거리이다.
여기에서 미스코리아 미(美) 이승연이 탄생한다.
북한은 가칠봉을 마주보는 비무장지대 북측 지역 운봉(일명 스탈린고지. 해발 1천358m)과 매봉(일명 모택동고지. 해발 1천290m)에 있는 폭포에서 여군이 자주 목욕을 해 남한 군인들을 현혹시켰다.
이 때문에 폭포의 이름이 ‘선녀폭포’다.
강원도 철원 평화전망대 부근은 10일 동안 고지 점령자가 무려 20여 차례나 바뀐 백마고지가 위치한다.
4만명의 사상자를 냈고 28만 발의 탄알을 사용했다.
전투 전 고지 높이는 396m 였으나 전투 후 1m가 깎인 395m로 됐다.
자연 그대로는 1m 풍화에 100년의 시일이 소요된다고 한다.
그러니 1세기 동안에 발산됐을 인간의 잔인성이 10일에 집약됐다고 볼 수 밖에..
경기도 연천 열쇠전망대 부근은 T본 능선과 L고지가 위치한다.
이는 모두 미군이 공중에서 바라봤을 때 비슷한 모양의 알파벳 이름을 붙인 것이다.
60년이 넘도록 그 이름은 한국에서 살아남아 그대로 불리고 있다.
이 외에도 치열한 전투로 산의 모양이 깎이고 북한군의 시신이 떠내려 와 ‘피의 능선’이라 불리는 지역도 비무장지대 내에 위치해 있다.
한반도의 허리를 자른 휴전선은 1950년 6월26일 발발한 한국전쟁이 1953년 7월 27일 밤 10시에 휴전돼 생긴 군사분계선이다.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이 합의한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정전협정)'에 따라 육상에 그어졌다.
군사분계선이란 두 교전국(交戰國) 사이에 휴전이 제의됐을 때 그어지는 군사행동의 경계선을 의미한다.
한국의 휴전선은 동에서 서로 횡단해 그어졌으며, 155마일(약 250km)에 걸쳐 200미터 간격으로 설치한 황색 표지판 1천292개로 이뤄졌다.
유엔사가 696개, 북측이 596개를 관리한다.
이 휴전선을 경계로 남·북 각 2km씩 비무장지대가 위치한다.
휴전선이 아주 높은 벽이나 철창처럼 생겼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저 땅에 팻말을 박아 놓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다 보니 민간인이 들어갈 수 있기에 비무장지대 끝인 남방한계선으로부터 5~20km 남쪽으로 민간인통제구역을 조성했다.
약칭 ‘민통선’이라고 불린다.
민통선 바깥 경계는 군인들이 지키고 있다.
155마일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한은 총 11개의 전망대를 두고 있다.
비무장지대에 철책이 깔린 건 1960년대 후반이다.
방식도 진화해 현재는 3중의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있다.
기자는 국토대장정에 참여하면서 파주시 도라산전망대를 다녀왔다.
도라산전망대는 11개의 전망대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다.
대장정 대원들은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12박13일에 걸쳐 400km를 걸어 전망대에 도착했다.
사전 설명대로 다양한 나라에서 찾은 관광객으로 전망대는 붐볐다.
그 순간 부끄러웠다.
제대로 마르지도 않은 옷을 계속 입어 냄새나고 땀에 절은 복장이 아닌 우리 나라가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 정말로 부끄러웠다.
통일을 주제로 열린 국토대장정이니 주로 민통선 안쪽과 비무장지대 부근을 걸었다.
걷다 보면 총을 맨 채 트럭에 탑승한 군인들과 마주치게 된다.
그들은 스무살을 갓 넘긴 청년들이다.
평화통일을 외치며 천리길을 걷는 대장정팀과 철모를 쓴 군인들은 눈이 마주쳤다.
어떤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독일의 정치학자 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는 정치의 정의를 이렇게 내렸다.
‘정치란 적과 동지를 나누는 것이다’.
전쟁은 인간성이나 인간애를 가지면 성립되기 어렵다.
적군과 아군이 아닌 같은 하나의 인간으로 상대의 가슴팍에 총칼을 들이대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만 서로의 가슴에 겨눈 총과 칼을 거둔 평화의 시대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