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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태민안 지향, 조선 천재 발자취를 따라 - 오산문화원, 2013 테마 있는 인문학 실학기행
  • 기사등록 2013-07-12 2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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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왕도정치 이념을 구현, 국태민안을 꿈꾸던 조선시대 천재 실학자 정약용. 

 

▲ 전남 강진군 도암면 만덕리 339-1. 다산초당 마루에 놓여 있는 정약용 영정.

 

그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인문학 실학기행이 펼쳐졌다.  

 

▲ 전남 강진 유물전시관엣 전시된 거중기. 정약용이 화성 축조 시 설계했다.

 

오산문화원은 최근 오산·화성·수원의 문화교류로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正祖·재위 1776~1800)에 주목했다.

 

▲ 실학 기행에 나선 일행들이 다산초당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그 중심에 정조의 총애를 받았던 천재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년)의 발자취를 좇고자 그의 유배지였던 전라남도 강진으로 인문학 기행을 기획했다.

 

▲ 기념 촬영 전 다산초당에 참배하는 기행단.

 

기행단을 따라 차향과 학문, 백성을 사랑했던 정약용의 삶의 궤적을 살펴 봤다.

 

▲ 다산(茶山) 정약용 영정.

 

■ 기행단 구성원은 각계각층

 

7월12일 금요일 오전 7시20분쯤 오산문화원 앞.

 

옅은 안개속으로 후텁지근한 햇살이 파고 들었고, 저마다 배낭을 맨 일행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 1801년 11월 정약용이 강진에 유배 와 4년을 머문 사의재.

 

그들은 사뭇 설렘과 긴장한 모습으로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7시30분이 되자 기행단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 임명재 문화원장이 답사 기행을 축사하는 인사말을 하고 있다.

 

임명재 문화원장과 이수영 오산시 문화체육과장이 짧은 인사말로 일정을 알렸고 버스가 출발했다.

 

▲ 이수영 문화체육과 과장이 "학습은 함께 이루는 것이지만 교육은 일방적 주입이다. 내년에 더 좋은 프로그램 만들겠다"고 말하고 있다.

 

잠시 뒤 김충현 수원박물관 연구원이 실학과 정조, 정약용을 설명했다.

 

정약용은 조선시대  ‘엄친아’였으며 3년에 한 번 시행되는 과거(科擧)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천재였고, 외가 또한 재력가 집안으로 자연스럽게 많은 책을 접하며 자랐다는 사실과 더불어 조선시대를 풍미했던 실학자들과 그들의 사상 및 생활상 등을 재밌게 풀어 냈다.

 

▲ 사의재에서 강의를 듣는 기행단과 강의하는 강영석 문화해설사(맨 앞 밀집모자).

 

이어 유종대 오산문화원 사무국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문화원 사상 최초로 시행하는 답사에 그는 하루종일 동분서주했다.

 

유 사무국장은 서먹한 분위기를 기행단의 간단한 자기소개로 채웠다.

 

▲ 유물전시관에서 기념촬영하는 기행단.

 

기행단 구성원은 오산시민을 위주로 선발했으며, 인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면 사는 곳을 애써 구분하지 않았다.

 

기행단 구성원들은 각계각층에서 모였다.

 

▲ 전남 강진 강영석 문화해설사가 사의재에서 문화 설명을 하고 있다.

 

평소 문화유적에 관심을 가졌던 문화해설사, 손주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참가했다는 60대 열혈 등산할머니, 직장을 땡땡이(?) 치고 왔다는 샐러리맨 등.

 

▲ 사의재 내부.

 

하나 같이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인문학에 흥미를 지녔다는 점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진행된 실학퀴즈 대결은 이들의 해박한 인문학 지식이 고스란히 쏟아 지면서 빛을 발했다.

 

▲ 사의재 뒤켠에서 바라 본 사의재.

 

■ 실학·정조·정약용

 

실학은 17세기 중엽부터 19세기 초반까지 조선 후기 사회에 나타났던 새로운 사상이다.

 

당시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성리학의 관념성과 경직성을 비판하며 경세치용과 이용후생, 실사구시의 학문이 강조됐다.

 

▲ 사의재 앞 기념비석.

 

실학(實學)은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이라는 뜻으로  ‘유학의 전통에서 공리공론(空理空論)에 기초한 헛된 학문’이라는 뜻의 허학(虛學)과 대립된 말로 폭넓게 쓰였다.

 

중국 송(宋) 나라의 정이(程頤)가 실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

 

실학이라는 용어는 한국과 중국, 일본에서 17세기 이전부터 폭넓게 사용돼 왔다.

 

▲ 사의재 앞 연못의 연꽃.

 

오늘날은 17세기~19세기에 걸쳐 조선 후기 사회에서 유형원(柳馨遠), 이익(李瀷), 정약용(丁若鏞), 박지원(朴趾源), 홍대용(洪大容), 박제가(朴齊家), 김정희(金正喜), 최한기(崔漢綺) 등을 중심으로 나타났던 유학의 새로운 학풍이자 사상 조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정조는 조선 제22대 임금(재위 1776~1800)으로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며 폐단을 없앴다.

 

▲ 사의재 뒤켠 주모상. 아무도 가까이 하고자 않았던 정약용을 기거하게 해 준 여인이다.

 

또한 전제(田制) 개혁에 뜻을 둬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해 왕정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 사의재 측면 모습.

 

이름 산(祘).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惠嬪).

 

▲ 사의재 들어가는 표지판.

 

1759년(영조 35년)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같은해 5월 아버지(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 사의재 앞 연못.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했다.

 

정조는 천주교 뿐 아니라 명나라 말, 청나라 초 패관소품의 학을 속학(俗學)이라 하여 경계의 뜻을 함께 보였다.

 

▲ 사의재 입구에 도착한 기행단이 기념비석을 보고 있다.

 

재위 초부터 문체가 날로 흐트러지는 추세를 바로잡으려는 뜻을 본래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자신의 측근 가운데 천주교에 가까워진 사람들이 많았다.

 

한편 공격하는 측에 후자의 경향을 띤 사람들이 많은 상황을 간파, 양쪽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발전을 다지려는 배려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 정약용의 남도 유배길을 설명한 표지판.

 

정약용(1762∼1836)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자 귀농(歸農), 미용(美庸), 호 사암(俟菴), 탁옹(?翁), 태수(苔?), 자하도인(紫霞道人), 철마산인(鐵馬山人), 다산(茶山), 시호 문도(文度).

 

▲ 백련사 들어가는 부분. 여기서부터 천연기념물 동백나무가 울창하게 펼쳐진다.

 

그는 1762년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진주목사 벼슬을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4살에 이미 천자문을 익혔고 7살에 한시를 지었으며 10살 이전에 자작시를 모아 삼미집(三眉集)을 편찬했다.

 

▲ 백련사 올라가는 길에 울창한 동백나무 숲.

 

어릴 적 천연두를 앓은 그의 오른쪽 눈썹에 자국이 남아 눈썹이 셋으로 나뉘어  ‘삼미(三眉)’라 불린 이유로 큰 형 약현이  ‘삼미집’이라고 지었다.

 

10살 나이에 경사(經史)를 읽기 시작하고 16살부터 성호 이익 선생의 유고를 읽었다.

 

▲ 백련사 오르는 길에는 수천 그루의 동백나무가 군락지를 형성하고 있다.

 

마현에 터를 잡은 그가 한양(漢陽) 출입을 하게 된 배경은 그의 나이 15살에 한양(회현동) 풍산 홍씨 집안으로 장가를 들면서다.

 

본격적인 입신(立身)은 20대부터였다.

 

▲ 백련사에서 내려다 본 강진군 앞바다.

 

22살에 초시 합격과 성균관에 입학하면서 교유관계를 넓혔다.

 

성균관 재학 때 이미 정조에게 인정을 받았고, 28살에 마지막 과거시험(대과)에서 2등으로 합격, 벼슬길로 나갔다.

 

▲ 만덕산 한 켠에 자리 잡은 백련사.

 

정약용은 23살에 이벽(李蘗)에게 서학(西學)을 듣고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다고 전한다.

 

서학에 심취했던 과거 때문에 순탄치 못한 인생을 살아야 했다.

 

▲  백련사 경내에 둘러 앉아 강의를 듣는 기행단.

 

20대 초반 서학에 매혹됐지만 그 뒤 제사를 폐해야 한다는 주장과 부딪혀 끝내 서학에서 손을 끊었다고 고백했다.

 

그럼에도 천주교 관련 사건이 일어 날 때마다 오해를 받았다.

 

▲ 백련사에서 기행단을 맞이한 강아지. 50cm 이상 접근하면 화 낸다.

 

천주교 문제가 터지기 전 그의 관료생활은 탄탄대로였다.

 

정조의 최측근으로 관직은 희릉직장(禧陵直長)으로 출발해 가주서(假注書), 지평(持平), 교리(校理), 부승지(副承旨) 및 참의(參議) 등으로 승승장구했다.

 

▲ 백련사에서 다산초당 가는 길의 차밭. 멀리 강진 앞바다도 보인다.

 

주교사(舟橋司)의 배다리 설계, 수원성제와 기중가(起重架) 설계 등 빛나는 업적도 많았다.

 

한 때 나마 외직으로 내몰렸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고 고마고(雇馬庫) 개혁, 가좌부(家坐簿) 제도 개선, 마과회통(麻科會通) 저작 등 훌륭한 치적을 후대에 남겼다.

 

▲ 다산 초당 가는 길의 나무들. 나무 그늘과 기운으로 시원하다.

 

■ 사의재-다산초당-백련사-마량항

 

정약용의 가장 큰 후견인 정조가 1801년(순조 1년) 승하하면서 그의 고난도 뒤따랐다.

 

신유사화가 발발하면서 정약용 주변 인물들이 참화를 당했고, 손위 형 정약종도 참수를 면치 못했다.

 

▲ 다산 초당에서 이종철 오산시 문화해설사가 사진을 찍고 있다.

 

정약용은 40세 되던 해 2월 경북 장기로 유배된 뒤 그해 11월 전라도 강진으로 옮겨졌다.

 

이는 18년간 지속된 고단한 유배생활의 시작이었다.

 

▲ 나무들 사이로 아늑하게 위치한 다산초당.

 

당시 유배가 지니는 의미는 정계와 권력에서 단절되는 것으로 곧 세상과 격리를 뜻했다.

 

섬으로 유배된 사람들은 종종 거칠고 무서운 바닷길에 내쳐지는 일도 발생했었다고 한다.

 

▲ 다산 초당 한 켠에 위치한 천일각.

 

이런 이유로 비록 유배를 보내기는 하지만 정약용의 천재성을 높이 샀던 조정은 그를 섬이 아닌 강진에 머물게 했다.

 

유배는 당사자에게 고통스런 일이지만 그 지역의 문화를 발전시킨다는 측면도 있다.

 

▲ 정약용은 이 천일각에서 흑산도로 유배 간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워했다.

 

정약용이 18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강진지역의 문화가 한층 높아졌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버스가 강진 톨게이트를 빠져 나오고 강영석 강진 문화해설사가 합류했다.

 

▲ 초당 한 켠 정약용이 농사 지은 계단식 밭.

 

그는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강진 이곳 저곳을 상세히 설명했다.

 

일정을 마치고 그와 헤어짐이 아쉬웠던 건 아마도 강진을 찾은 이들에게 하나라도 더 설명해주려는 열정 때문이었으리라.

 

▲ 초당 뒤켠 정약용이 쓴 글씨 '정석'.

 

일행들 또한 그의 이야기에 귀를 쫑긋하며 시종일관 진지하게 집중했다.

 

더운 날씨에 연신 부채질을 하면서도 그가 뿜어내는 설명은 놓치지 않았다.

 

▲ 초당 옆 비류폭포. 정약용이 나무 홈통을 이용해 산속물이 떨어지게 했다.

 

특히 만덕산 백련사에 올랐을 때 옹기종기 앉아 설명을 듣는 기행단들 모습은 마치 여름학당을 연상케 했다.

 

주모(酒母)의 배려로 4년 동안 정약용이 기거했다는 사의재가 답사가 첫 번째 코스였다.

 

▲ 다산 초당 내 현판.

 

강영석 문화해설사는 이 사의재에서 처절했던 정약용의 유배 초기 생활을 묘사했다.

 

빈대와 이가 들끓었던 민초들의 거처.

 

▲ 마량항 등대.

 

그마저도 천주교 신자라는 오명으로 백성들은 정약용을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사의재에 기거하던 주모가 그를 받아 준 것이다.

 

▲ 마량항 다리.

 

주모는 정약용에게 여성 차별을 물었다.

 

정약용은 주모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이제껏 그가 깨닫지 못한 바를 주모가 일깨웠던 것이다.

 

▲ 마량항 바닷가로 쏟아지는 햇살.

 

정약용은 사의재에서 제자를 양성했다.

 

또 흑산도로 유배를 당한 둘째 형 정약전에게 들개를 잡아 먹는 법을 편지로 써서 보내기도 했다.

 

▲ 떼배. 예전에 이용하던 선박이다.

 

강영석 해설사 설명에 따르면 대부분 유배는 무인도로 보내지기 때문에 그들의 사인(死因)은 결국 식량난이었다고 한다.

 

▲ 정약용선생이 유배초기 머물렀던 사의재

 

다시 백련사에서 다산초당으로 오르는 길은 수십분이 걸리는 산길이었다.

 

이날 따라 남부지방을 강타한 무더위와 싸우며 일행은 산을 올랐다.

 

▲ 마량항 모습.

 

백련사부터 시야에 든 강진 앞바다와 차나무밭,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천 그루의 동백나무가 일행을 마중했다.

 

다산초당은 숲으로 우거진 곳에 아늑하면서도 고즈넉이 자리잡고 있었다.

 

▲ 마량항 등대 가까이서.

 

다산이라는 이름은 차 다(茶), 뫼 산(山)을 써 차가 많은 산이라는 뜻이다.

 

초당(草堂)은 풀 초, 집 당으로 초가집을 연상하기 쉬우나 이는 자신의 거처를 낮춰 부르는 명칭이다.

 

초당은 정약용이 직접 농사를 지어 먹었다는 층계식 밭과 연못, 제자들의 유숙처 서암, 흑산도로 유배간 둘째 형 정약전을 그리며 심화를 달래던 천일각 등이 있다.

 

다산초당은 정석, 다조, 약천, 연지석가산의 다산사경이 있다.

 

정석은 초당 서편 뒤쪽 해배를 앞두고 발자취를 남기는 의미로 정약용이 직접 쓴  ‘丁石’이라는 글씨를 바위에 새긴 것이다.

 

다조(茶竈)는 차 다, 부뚜막 조를 써 차를 끓이는 부뚜막이라는 뜻이다.

 

정약용은 초당 앞 작은 바위 다조에서 화로를 이용해 차를 끓여 마셨다고 한다.

 

정약용은 초당에 머물며 차와 벗이 됐다.

 

차는 정약용이 18년이라는 긴 유배생활을 견디게 해 준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많은 그의 호 가운데 다산을 지은 것도 이 곳과 기인한다.

 

▲ 다산초당 전경

 

약천은 초당 뒤편의 샘으로 정약용이 수맥을 잡아 만들었다고 한다.

 

가뭄에 마르지 않고 항상 맑은 약수가 솟아 오른다.

 

연지석가산은 초당 옆 연못이다.

 

1808년 봄 정약용이 초당으로 옮겨 바닷가 돌을 가져다 많은 연못으로 가운데 조그만 봉을 쌓아 석가산이라고 했다.

 

정약용은 나무 홈통을 이용, 산속 물이 떨어지게 만들고  ‘비류폭포’라 이름지었다.

 

연못에 잉어를 길렀으며 유배에서 풀려난 뒤 제자들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잉어가 얼마나 자랐는지 묻기도 했다.

 

기행단은 초당에서 내려와 유물전시관으로 향했다.

 

이 곳은 다산 수련원, ‘다산 정약용 말씀의 숲’ 등이 있다.

 

전시관 내부는 정약용의 유물, 영정, 가계도 등 소장품 190점이 진열돼 있다.

 

더불어 그의 일생과 업적이 패널과 모형, 조형물 등으로 입체감 있게 꾸며졌고 터치스크린 검색도 가능하다.

 

수원 화성(華城)을 축성하는 모형과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등도 눈에 띈다.

 

영상실은 정약용 일생과 강진을 소개하는 7분짜리 영상물이 상영된다.

 

마지막 답사지는 마량항이다.

 

마량항은 전남 강진군 마량면 마량리에 위치하며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다고 알려졌다.

 

강영석 해설사에 따르면 마량항에 제주 돌하르방 두 기가 서 있는데 ,이는 강진을 자주 방문했던 제주도지사가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마량항이라는 이름도 말 마(馬)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오는 말을 실어 나르던 항구였던 것이다.

 

마량향에서 제주도로 도자기를 실어 나르기도 했는데 오는 길에 배의 균형을 위해 제주의 돌을 실었단다.

 

그 돌들을 쌓아 놓은 언덕도 있는데, 그 곳은 지금도 흙을 파면 제주의 돌이 나온다.

 

▲ 제주도에서 말을 가져오는 항구라는 뜻의 마량항 (馬良港)

 

돌아오는 길에 남경식 경기향토문화연구위원이 오산의 기원과 어원, 시조를 까마귀로 정하자는 제의와 설명이 이어졌다.

 

그리고 김충현 연구원과 유종대 사무국장이 오산과 실학 퀴즈를 냈다.

 

퀴즈를 맞히는 기행단은 문화상품권이 상품으로 지급됐다.

 

■ 답사신청 이것만은 알고 가세요!

 

인문학 기행은 말 그대로 탐방이며 기행이다.

 

실학의 발자취를 따라 가는 주제를 정해 놓은 만큼 자유와 여유를 만끽하는 여행과는 좀 거리가 있다.

 

수십명으로 구성된 단체가 움직이니 규칙과 규율도 잘 지켜져야 한다.

 

문화원이 시행하는 답사는 일정과 주제가 확실하게 정해진 기행이다.

 

따라서 조금은 바쁘고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일정을 소화하느라 다소 빠듯하겠지만 잠시 일상을 떠나 인문학과 실학에 집중하는 일은 분명 뿌듯하고 흐뭇한 것이리라.

 

답사에 참가할 때는 편한 신발을 권한다.

 

유적지나 문화재를 발로 걸으며 찾아 다니는 만큼 운동화나 등산화가 제격이다.

 

또 시간도 엄격히 지켜져야 한다.

 

현장의 5분은 도착지의 1시간이다.

 

 ‘나 혼자 조금 더 보고 가는 게 뭐 어떻겠어?’라고 생각하면 오산(誤算)이다.

 

아울러 길을 잃을 우려가 있으므로 가능하면 인솔자 뒤에서 설명을 들으며 따라가자.

 

문화해설사는 그 지역의 역사와 유래, 지형에 밝은 사람이다.

 

음주가무도 절대금지다.

 

▲ 오산문화원은 앞으로 4번의 답사를 더 계획하고 있다.

 

■ 오산문화원 답사는 계속돼요~!

 

오산문화원이 야심차게 준비한 2013 테마가 있는 역사기행  ‘실학정신을 찾아서’는 앞으로 4번 더 진행된다.

 

2차 기행은 본래 충남 예산이었으나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위해 5차 경남 함양 프로그램으로 대체한다.

 

2차 답사는 8월9일  ‘양반사회를 비판하던 그가 다스리던 고을을 가다’ 로 경남 함양 연암 박지원 편이다.

 

연암 물레방아공원-거연정-오도재 순서로 진행된다.

 

3차는 9월13일 남양주 실학박물관이다.

 

기행은 다산 생가 및 유적지를 방문한다.

 

4차는 10월11일 실학의 아버지 반계 유형원을 답사하는 것으로 전북 부안 유형원 사적지-궁항 전라좌수영 세트장-내소사 등의 순서로 펼쳐진다.

 

마지막으로 5차 11월8일은 충남 예산 추사 김정희 기행에 나선다.

 

예술에 가려진 실사구시의 혼 김정희의 발자취를 찾아 추사 고택-수덕사-한국고건축박물관 등을 답사한다.

 

▲ 오산문화원 홈페이지에서 다양한 답사 일정 확인이 가능하다.

 

■ 정약용의 시 한 수 소개

 

정약용은 일생 동안 500권에 이르는 저서를 남겼다.

 

전남 강진 유물전시관에 걸린 그의 시 한 수를 소개한다.

 

사언체 고시를 초서로 쓴 6폭 병풍이며, 진나라 도잠이 쓴  ‘정운’ 과 ‘권농’에 나오는 구절을 일부 인용했다.

 

아침에 붉은 노을 먹고 저녁엔 떨어진 이슬 마시네

푸른 학이 훨훨 날아 나의 정원 나무에 내려 앉네

거문고 타지 않아도 풍류는 더없이 맑다오

조용히 바라보며 호흡을 고르니 고요하여 소리가 없네

소박하고 참됨을 안고 도와 이웃하리

아홉 번 익힌 단약 먹으며 만세토록 길이 청춘을 누리세

- 다산병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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