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hong 기자
【오산인터넷뉴스】<이종철의 오지탐험> 캐나다 국기의 복자기 단풍나무가 각종 활엽수와 잘 어우러져 가을에는 온 세상의 단풍을 전시해놓은 것 같은 단풍 계곡.
단풍은 붉은색, 노랑, 주홍색이 뚜렷이 어울려 은은하고 깊은 색감이 냉천수로 흐르는 계곡물과 조화를 이룬다.
실로 우리나라 제일의 단풍 절정이라 할 수 있겠다.
단풍이 밀림과 같이 자생한다 해서 ‘단임마을’이라 이름 붙여졌다 하니 그 장관을 가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정선 시내에서 오대천을 끼고 진부 방향으로 25킬로미터.
또는 진부 나들목에서 오대천을 끼고 정선 방향으로 17킬로미터 부근 왼쪽에 숙암교 건너 좌로 가면 단임 계곡을 낀 단임마을이 나온다.
▲ 단임계곡 초입. 계곡을 끼고 마을은 가을이면 국내 제일의 단풍을 자랑한다.
몇년 전만 해도 오지 중의 오지로 사람이 간신히 다니던 오솔길이 2년 전 커다란 수해 복구 공사가 이뤄졌다.
그 후 길은 1차선으로 넓어지고 중간 중간에 시멘포장 길과 수해방지 제방이 잘 정돈 돼 있다.
“10월 말쯤 단풍 보러 오시이소. 내장·설악 단풍은 껨도 안 돼 드래요.”
25년 전부터 둥지를 잡은 이영광 노인의 마을 칭송이다.
6·25 전쟁 후 피난처와 조용한 자연을 찾아 헤매던 옹은 22살 때 월남전에 참전했다.
▲ 단임마을 이영광 씨 자택. 그는 이곳에서 친자연적 생활을 하고 있다.
당시 총포 소리에 귀가 상해 예민하게 된 심신을 추스르려 이곳에 터를 잡았다.
그저 산과 물과 자연이 좋아 이곳을 찾았고 아무런 불편 없이 정주하고 있다.
집 주변을 둘러보면 온통 자연식품이 즐비하다.
▲ 이영광 씨 자택 한 켠의 장독대가 빛을 받아 반짝거린다.
산나물, 질경이, 곤드레, 곰취, 참나물, 산마늘 멍이, 고들빼기, 방가지 등이다.
외부에서 구입하는 먹을거리가 거의 없다는 옹은 가끔 지나는 사람들이 가져다주고 남기고 가는 것으로도 먹고 사는 데 부족함이 없다니 그야말로 무릉도원 이라 할 만하다.
10년 전까지 토종벌을 치다가 몰사시킨 후로 오직 초야와 더불어 사는 옹이다.
“산소와 물과 피톤치드로 한 달은 먹지 않아도 살드래요. 평생 떠돌이 인생이 이곳에서 25년 이상을 칩거하고 있으니 내 인생과 궁합이 딱 들어맞는 곳이 아니고 뭐드래요.”
이영광 옹이 말했다.
500평 되는 작은 텃밭에 제가 자라고 싶은 대로 놔두면 찬거리 되고 계절이 바뀌면 알아서 열매를 준다.
▲ 이영광 씨 자택 입구. 필자 이종철 오지연구소장이 가을 다시 찾아 찍은 컷.
이러니 자연이 곧 스승이요 생명줄이라는 옹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양 만큼만 취하고 욕심과 사심 없이 살면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없단다.
애초에 있던 방 두 칸에 뒤쪽으로 겹방을 붙여지어 아궁이를 따로 내어 놓으니 필요할 때만 방을 데우고 한 겨울에도 겹방이라 추운 줄 모른단다.
일 년 내내 햇빛은 12시부터 3시까지 하루 딱 3시간 비추는 터라 겨울에는 3시간 동안이 빛을 쬐고 빨래도 말리는 바쁜 시간이란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12킬로미터 심연의 계곡에 아랫쪽으로 창문 마냥 빼꼼히 나있는 하늘은 쪽방에 나 있는 작은 창처럼 이곳의 유일한 하늘이었다.
초가을에 김치를 담궈 땅 속에 묻으면 3~4년이 지나도 완숙 상태에서 변하지 않는다.
이 백김치는 이곳의 행복을 집대성한 좋은 표본이기도 하다.
거기에 1년에 2말 정도 된장을 담아 개복숭아로 절임을 하고 복숭아효소, 돌배술 등을 담아 무한정 취할 수 있으니 얼마나 몸과 마음이 풍족하랴.
인간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간다는 지론을 펼치는 옹은 인간은 기, 수, 화, 풍으로 산다고 말한다.
“기는 땅이요, 수는 물이고, 화는 열이요, 풍은 바람이니 이 4가지가 없으면 인간이 존재할 수 없고 이것을 잘 다스리면 복된 삶이되는 것이라. 결국 인간은 나중에 흙 보탬이 되는 순회가 되는 것이지요.”
천막으로 두른 우물가에는 뒷산에서 솟아나는 천연수가 한 여름의 무더운 온도를 말끔히 씻어내기에 알맞다.
일년 내내 산 속의 샘을 주방까지 끌어 쓴다는 이 옹의 천연우물의 구조를 보고 필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집 뒤 70미터 산 속의 아궁이 만한 늪지에다 1미터 가량 샘을 판 뒤 소나무로 70센치미터 길이의 소구유 모양의 틀을 설치했다.
그렇게 물이 고이게 만들고 덮은 다음 아래쪽에 구멍을 내어 주방까지 호스로 얼지 않게 땅 속으로 연결해 받아 사용했다.
가히 '로빈슨 크루소'의 지혜를 닮았다.
이물은 한여름에도 너무 차가워서 오후에 함지박에 담아 냉기를 식혀야만 샤워를 할 수 있단다.
음료수와 김치는 물론 야채까지 담아놓은 물을 마시니 물맛도 맛이려니와 냉기와 시원함이 냉장고 생수와 맞먹는다.
“냉장고가 필요 없지라. 겨울에는 너무 추워 이 물도 얼어버려. 그 때는 앞 계곡에서 깊은 웅덩이 얼음을 깨지.”
이 마을은 지금도 휴대폰이 연결되지 않는다.
12킬로미터 계곡을 들어서자마자 전화가 불통으로 변하고 계곡 입구를 벗어나는 순간 기계가 작동했다.
그 현상은 무를 자로 재어 칼로 베어낸 것 같은 확실한 경계선이 그어짐에 신기할 따름이다.
그 뿐이랴! 택배는 아예 유통이 되질 않는다.
다만 주민들의 우편은 왕래하기에 우체국 택배만이 간간이 왕래할 따름이다.
다녀간 지인이 무엇을 택배로 보내면 정선에 소재한 택배 영업소에서 연락이 온다.
이 마을의 수신자는 정선 택배회사에 연락해 우체국 택배로 재발송을 부탁한다.
최종적으로 우체국에서 택배비 두 곳의 요금이 정산되는 시스템이다.
이곳에 거주하는 7가구의 모든 연락이 우체국으로만 연결된다.
그나마 일반전화는 개통이 되고 있어 다행이고 119나 기타 생활서비스는 이뤄지고 있으니 다행이랄 수밖에.
▲ 마을 한 켠에 위치한 분교. 현재는 외지인이 분양해 휴게시설로 사용하고 있다.
계곡중간에는 폐교된 북경초교, 단임분교 교사와 조그마한 터가 있었다.
15년 전 어느 분이 구입해 작은 초당으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 옆에 세워진지 꽤나 오래된 표지기념석이 외로이 터를 지키고 있었다.
29년 간 졸업생이 184명이라니 매년 5~7명 정도의 졸업생이 졸업을 한 셈이다.
▲ 분교 내 위치한 표지석.
그 규모가 새삼스러워진다.
옛날의 정취가 아직도 남아있는 추억을 그대로 간직하고 그 한쪽에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오래된 고목만이 페교를 지켜보고 있었다.
우측으로 흐르는 심연의 계곡은 천년을 거슬러 흐르는 듯 시원한 물소리와 함께 지상의 모든 잡티들을 열심히 씻어 내리고 있었다.
과거의 순수하고 깨끗한 환경처럼 오염되고 더럽히지 말라는 경고음을 조용히 소리 지르듯이 계곡 혼자의 외침이 유난히 우렁차다.
폐교 건물은 간간이 오가는 길손의 추억어린 휴식터로 옛 모습을 그런대로 잘 간직하고 있었다.
백지라는 야초는 자랄수록 밑동이 마치 단단한 대나무처럼 굳어져 이북에서는 대나무로도 불린단다.
마디 속에다 펌프를 박아 물놀이 물총으로 이용하였다는 옹은 그 기억이 새삼스러워 오늘도 백지를 애지중지 키운다.
크 ~ 형님 잘 보고 갑니다.
더위가 싹 가시네요 .언제나 건강 하시고 좋은 글 많이 담아 주세요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