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hong 기자
지난 주말 첫 주례를 섰다. 그동안 제자들의 주례 요청이 있을 때마다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사양해온 터이다. 무엇보다 짧은 연륜도 문제이거니와 스스로 남들 앞에서 주례사를 할 만큼 훌륭하게 살아오지 않았고 또 존경스러운 위치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벌써 주례를 서야 될 만큼 나이를 먹지 않았고 아직 젊다(?)는 생각이 주된 이유였다. 그러나 어찌되었던 피해 갈 수 없는 불가피한 이유로 주례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결혼식장을 찾아 수원으로 내려가는 차안에서 신랑이 되는 K군과의 인연을 떠올려 보았다. 근 5년간이나 지속되었던 인연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같은 동향이기도 한 만남이 주례선생님으로 발전하리라고는 서로 꿈도 꾸지 않았는데 참 사람의 만남이란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축하객들 중 많은 이들이 나와 K군과의 인연으로 얽혀 있는 사람들이었다.
누군가는 인간의 만남이란 씨줄과 낱줄로 엮어 있어서 마치 피해 갈 수 없는 그물망처럼 되어 있다고 했지만 새삼스레 만남에 대하여 성찰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인간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구절도 좋지만 나는 ‘인간의 만남이 사람을 키우고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가슴에 더 와 닿는다.
그렇다 삶은 만남이다. 그 만남이 철학을 낳고 역사를 만들고 인재를 키웠다. 정진홍 씨는 ‘인문경영’에서 황진이와 서경덕과의 만남, 퇴계와 고봉의 주고받은 편지의 만남이 철학이며 이순신과 류성룡의 만남이 나라를 구하고 역사의 물꼬를 바꾸었다고 했다.
더 나아가 예수와 베드로의 만남, 예수와 바울의 만남이 초대 기독교의 뿌리가 되었고 석가모니는 왕자의 신분에서 성 밖 병든 노약자와의 만남이 생로병사의 해탈을 위한 출가를 결심하여 오늘날 불교문화를 만들었다. 유비와 제갈량의 만남, 당 현종과 양귀비의 만남이 역사를 만들고 대통령 케네디와 학생 클린턴의 만남이 한 인간의 삶을 움직였다. 또 있다. 전쟁이후 60년 만에 원조를 받는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한 대한민국의 반기문, 아니 세계의 반기문 UN 총장은 웅변대회 우승 후 고3때 미국을 방문하여 케네디 대통령을 만난 후 그의 목표가 더 확고해 졌다고 한다.
이렇듯 우리 일상의 다반사가 만남이며 그 만남을 통하여 일상은 구성되고 형성된다. 그러나 좋은 만남이 있는 반면에 잘못된 만남이 있을 수 도 있다. 최근의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는 공직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만남의 결과에 대하여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사람을 가려서 만나야 되고 자리를 골라서 앉는 분별력을 잃으면 한 순간의 만남이 나락(奈落)으로 떨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분별력을 신(神)이 아닌 이상 인간이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마는 경계를 게을리 할 수밖에 딱히 도리가 없다.
인생은 수많은 역설이 존재하는 즉 패러독스(Paradox))와 반전을 내포 한다. 세상은 본래 공정하지 않다. 그러기에 살아볼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숫 주례사에서 신랑신부에게 말했다. ‘오늘 두 사람의 만남을 축하 하고 끝까지 함께 가는 만남이 되기를 부탁 한다’고 그 만남의 결과가 서로에게 축복이 되기를 기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