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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아버지, 그 위대한 이름 - 작은 몸짓이라도 쏙 빼닮고 싶은 영원한 존재
  • 기사등록 2013-02-03 20: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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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조윤장 편집국장 = 「아버지, 그 위대한 이름이여」

 

 

자식들은 커가면서 어느 시점까지 아버지를 닮고자 한다.

 

세상에서 아버지 같은 위대한 존재가 없다고 여기며 마치 우상(偶像)처럼 생각한다.

 

아무리 작은 몸짓이라도 아버지에게 보여지는 모습은 무조건 대단한 것으로 느낀다.

 

아버지는 나와 유전적으로 가장 닮은꼴이다.

 

생물학적으로 99.999%가 일치한다.

 

사람들마다 다소 차이는 있지만 성격·생김새·식성·습관·목소리 등 아버지와 자식은 정말 흡사한 점이 너무나 많다.

 

왜 그럴까?

 

멘델의 유전법칙(遺傳法則-laws of inheritance)에 따르면 그렇다.

 

멘델(Mendel, Gregor Johann·오스트리아·1822~1884)은 브륀의 수도원에서 신부로 재직하면서 8년간 완두 교배실험에 빠졌다.

 

마침내 1865년 실험결과 분석을 통해 발견한 유전법칙(우열의법칙·분리의법칙·독립의법칙)을 발표했다.

 

이 유전법칙은 ‘부모의 형질이 자손에게 전해지는 현상’으로 정의된다.

 

하지만 멘델이 발표한 유전법칙은 당시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단위형질에 주목한 완두 실험은 성공했으나, 이어 다른 재료를 사용한 실험은 형질분석이 결여됐기 때문에 실패로 끝났다.

 

어쨌든 우리는 아버지 유전자(遺傳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분신(分身)이다.

 

그래서 “아버지 나를 만드시고, 어머니 나를 낳으셨다”는 말에 토를 달고 싶지 않다.

 

참으로 죄종하고 외람(猥濫)되지만, 필자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이랬다.

 

여덟 살 상고머리 소년은 유난히 병치레가 잦았다.

 

여름 어느 날 수업중에 선생님이 교실 밖을 가리키며 “나가보라”는 신호로 손짓하셨다.

 

창문너머에 아버지가 있었다.

 

소년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신작로를 따라 양쪽 옆으로 띄엄띄엄 몇 채 안되는 낡은 건물 틈 속에 유일한 단골(?) 구멍가게로 들어갔다.

 

주인 아줌마가 접시에 가득한 토마토를 내어 왔다.

 

그 때만 해도 주전부리할 간식이나 과일이 엄청 귀했기 때문에 소년이 어쩌다 호사를 누렸던 토마토(채소)는 45년이 흐른 지금도 단연 첫째로 손꼽는 그 것이다.

 

또 어떤 날은 수업이 끝나고 교문을 나서는데 아버지가 자전거를 앞세우고 기다렸다.

 

집까지 걸어가면 5리(2km)가 훨씬 넘는 거리지만, 이따금씩 아버지가 태워주는 자전거는 속력을 내지 않아도 언제나 신났었다.

 

자랑거리도 아닌 흐릿한 옛 기억들이 지금은 가슴 절절하고 소중한 추억이 됐다.

 

그런 아버지가 이제는 없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슬픔, 천붕(天崩)이었다.

 

왕조시대에 임금의 죽음을 붕어(崩御) 또는 천붕이라고 했다.

 

더불어 부모의 죽음도 천붕으로 썼다.

 

승하(昇遐)는 임금 뿐 아니라 존귀한 사람의 죽음에 쓰였다.

 

등하(登遐)·척방(陟方)·예척(禮陟) 등도 같은 뜻이다.

 

아마 우리나라 만큼 죽음을 일컫는 용어가 많지 않을 것 같다.

 

대통령의 죽음은 서거(逝去)라 한다.

 

사거(死去)를 높인 말이다.

 

종교별로 사용하는 용어도 구별된다.

 

가톨릭은 추기경 등의 죽음에 선종(善終), 불교는 큰스님 등의 죽음에 입적(入寂)·타계(他界)·열반(涅槃)·멸도(滅度)·입멸(入滅) 등으로, 개신교는 소천(召天)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사망(死亡), 운명(殞命), 별세(別世), 영면(永眠) 등 모두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또한 동사나 관용구로 숨지다, 몰하다, 졸하다, 돌아가다, 세상을 뜨다, 유계에 들다, 세상을 버리다, 유명을 달리하다 등 무수히 많다.

 

여기에 비속어로 밥숟가락 놓다, 깨 팔러 갔다 등 표현도 있다.

 

상황에 따라 병사(病死)·횡사(橫死)·동사(凍死)·익사(溺死)·아사(餓死)·객사(客死)·분사(憤死)·소사(燒死)·역사(轢死)·갈사(暍死) 등으로 구분한다.

 

요즘은 존엄사(尊嚴死)·안락사(安樂死)를 표현하기도 한다.

 

어제 한 줌 재로 아버지가 잠들어 계신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 내내 가슴 한 켠이 휑하고 먹먹했다.

 

미당(未堂) 서정주 선생이 1948년 시집 <귀촉도>에 발표한 ‘푸르른 날’을 아버지께 바친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저기 저기 저 가을 /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드는데 /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여기저기 저가을 / 끝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지는데 /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 봄이 또오면 어이하리야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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