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shong 기자
【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아들이 자전거를 타다가 오산천 다리 아래로 추락했다.
주위를 지나던 사람들이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겼다.
당시 아들의 유일한 보호자였던 아버지는 소식을 접하고도 아들을 찾아나서지 않았다.
병원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은 자라는 동안 여러 차례 ‘인계’됐다.
아버지와 함께 지내다 이혼한 어머니에게, 다시 친할머니에게, 그리고 건강이 악화된 할머니에서 이복 고모에게 옮겨졌다.
아들은 자신이 또 누구에게 ‘인계’될 지 끝없는 불안속에서 성장했다.
그러던 무렵 우연히 다솜지역아동센터를 알게 됐다.
아버지가 거주하는 오산시 오산동 근방이었다.
센터에서 아들은 마음 따뜻하고 오랫동안 자신의 곁에서 관심을 가져 준 사람들을 처음 만났다.
그 중에서 이진희 시설장은 이 소년에게 기억하고 싶은 추억을 주고자 노력했다.
둘은 손 잡고 오산천을 걸었다.
이진희 시설장은 소년의 마음을 위로하며 보듬었다.
소년은 점점 닫쳐졌던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 이진희 다솜지역아동센터 시설장.
소년의 깊은 상처는 이렇게 치유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따뜻한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소년은 방황했고 떠돌았다.
배고픔에 편의점 김밥을 훔친 소년은 지금 소년원에 있다.
열여섯 살이다.
이진희 시설장은 무너져 내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소년을 찾아갔다.
소년은 울지 않았다.
이진희 시설장이 돌아오는 길 소년의 진심어린 문자 메시지에 시설장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년은 아름다운 심장을 가진 아이였다.
그를 보듬었어야 할 부모도 주변인들도 아픈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우울증을 앓았고 그가 자랐던 환경을 고스란히 소년에게 대물림해줬다.
소년은 후천적 장애판정을 받았다.
소년은 그렇게 방치됐었다.
이진희 시설장은 “소년이 차라리 그렇게 (소년원에)들어가 있는 것이 마음 놓인다”고 말했다.
“거기서는 그래도 세끼를 다 먹잖아요”라고 하는 말에 마음 한 켠이 퀭해온다.
하루 세끼를 못 먹고 살았단 말인가.
“아이들은 나무 옮겨심듯 옮겨져요. 여기에서 다른 어느 곳으로 또 누가 자신을 떠날 지 항상 불안해하죠.”
▲ 다솜지역아동센터 아이들이 지도 선생님과 둘러앉아 공부를 하고 있다.
이진희 시설장은 말했다.
그런 이유로 이 시설장은 아이들 옆에 ‘함께 있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도록 그들과 함께 하는 것 만이 신뢰를 쌓고 자존감을 형성해 주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이들은 누군가가 자신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랐다.
이들에게 ‘믿음’이란 단어를 새겨주는 일이 가능할까.
오산에 지역아동센터는 총 8곳이다.
이 가운데 5곳 만이 보건복지부가 2년간 실시하는 진입평가에 통과해 정부지원을 받고 있다.
아동센터를 찾는 아이들은 대개 저소득층 자녀들로 한부모가정, 기초수급자, 외국인노동자가정 등 다양하다.
지원금은 개소당 월 400만원 정도다.
센터 1곳 정원은 29명 이하로 등록돼 있다.
이 아이들과 지도하는 사회복지사들의 급여까지 지원금에서 해결해야 하니 턱없이 빠듯하다.
간혹 후원자가 나타나기도 한다.
후원을 받는 아이 또한 복지재단의 후원조건에 부합해야 한다.
그렇지만 후원자가 끊기는 경우도 다반사다.
남겨진 아이들은 허탈감을 감출 수 없다.
아이들은 꿈을 꾸고 있다.
그 것은 단 한 번도 멈춰진 적이 없었으나 드러내지지도 않는다.
그들은 이런 꿈을 지니는 것 조차 드러내기를 부끄러워한다.
아동센터 복지사들은 아이들에게 수없이 노크를 한다.
그들의 문을 두드리고 기다리고 또 두드린다.
이진희 시설장은 말한다.
“너희들이 지금 누군가에게 (도움)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라. 너희는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이기에 그건 당연한 것이다. 시간이 흘러 너희가 당당한 사회인으로 성장했을 때 지금 받았던 사랑을 다른 이에게 나눠 주어라.”
얼마 전 무려 4개 대학에 합격한 친구는 사회복지를 전공한다.
중학교 때부터 품었던 희망이다.
피아노와 민요에도 재능을 보였었다.
이진희 시설장과 공연을 관람하고 돌아오던 길에 이 시설장이 “이제 나도 흰 머리가 난다. 늙었나봐”라고 장난스레 말했다.
듣고 있던 이 친구가 “선생님, 제가 사회복지사인데 무슨 걱정이세요?”하고 받아쳤다.
물론 “그런데 난 노인복지는 안 할 거야”라는 재치있는 농담이 덧붙기는 했지만.
“선생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평생 무료 염색권 무한 제공할게요.”
옆에 있던 또 한 친구의 말이다. 이 친구는 미용사를 꿈꾸고 있다.
언론사가 주최하는 NIE 대회에서 1위를 기록한 친구도 있다.
이 친구는 동시 짓는 재능이 일품으로 2천500명이 출품했던 대회에서 2위를 하기도 했다.
누구도 손봐주지 않은 그만의 동시였다.
‘풍선은 꿈/ 풍선을 타고 다른 먼 곳으로/ 날아갈 때를 상상해보면// 풍선은 믿음/ 풍선에 소원을 빌며/ 하늘에 날리는 것을 보면// 풍선은 나/ 언제나 높이, 높이 날아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 위 당선작 ‘풍선’ 중에서.
아이의 희망과 바람이 시에서 여실히 전해진다.
▲ 2천500명 중 2위에 입선한 동시.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생각하기 보다 저 아이들이 내 아이들과 같이 자라는 아이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해요. 인디언 속담에 ‘한 마을이 키우는 아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아이들이 만드는 문제는 어른들의 시각에서 비롯되는 거예요. 우리 아이들은 자신의 욕구를 조금 거칠게 표현할 뿐이에요.”
이진희 시설장이 말했다.
1991년 지역공부방으로 문을 연 다솜지역아동센터는 2006년에서야 시설등록을 했다.
동화, 역사·논술, 미술 등을 가르치는 자원봉사 선생님들이 있다.
운천고등학교 학생 11명이 지난해 10월부터 초·중학생들에게 학습지도를 하기도 한다.
이들은 교사를 꿈꾸는 친구들이다.
이진희 시설장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냐”고 물었다.
“(아이들은)밥을 먹으러 (센터에)오기도 해요. 여기 아니면 먹을 곳이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아이들이 정말로 원하는 건 학습이에요. 체계적인 학습을 받길 원하지만 재정여건상 어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