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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탐방] 그 시절 그 곳을 아십니까 ? - 이종철 오산시문화해설사, 죽미령·초전비 야사
  • 기사등록 2013-01-07 17: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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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탐방] = 이종철 오산시문화관광해설사(생활영어강사·독서심리지도사·오지탐험가) · 동행취재 이영주 기자

 

▲ 이종철 오산시문화관광해설사.

 

■ 팔만대장경도 모르고 보면 그저 빨래판

 

“팔만대장경도 모르고 보면 한낱 빨래판이나 도마로 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종철 문화관광해설사는 심도깊은 문화감상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가 이 글을 쓴 시기는 2012년 12월 중순 무렵이다.

 

오산에 숨겨진 채 그 동안 발굴이 제한됐던 역사적 사실을 시민들과 널리 문화콘텐츠로 공유하고자 나선 것이다.

 

그는 또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주민들을 찾아 인터뷰도 서슴치 않았다.

 

“문화재나 유적을 접할 때 가급적 문화관광해설사를 통해 깊이 있게 들어야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할 수 있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문화재나 사적은 문화관광해설사가 수식어 처럼 따라 붙는다.

 

이종철 문화관광해설사는 이들의 해석을 통해 듣는 ‘깊이’를 중시한다.

 

그가 전하는 오산의 대표적 장소, 죽미령과 UN초전비에 얽힌 야사를 들여다 보자.

 

■ 죽미령(竹美嶺) 유래

필자의 고향 내삼미2동은 예부터 수원과 평택을 잇는 신작로(국도1호선)가 지난다.

 

멀리는 한양과 부산을 잇는 나라의 대동맥 경부철도와 민족의 부침(浮沈 세력 따위가 성하고 쇠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을 몸으로 받아 들인 역사의 궤적을 같이 한 고개다.

 

▲ 1950년대 옛 초전비 앞에서 촬영한 국도1호선(신작로) 사진.

 

또 국토의 북단과 남단을 잇는 삼남길이면서 1960년대 산업화 전까지 육상 신작로는 경사가 너무 높아 트럭(당시 ‘도라꾸’)이 간신히 오르내리던 길이었다.

 

폭설이 쌓이는 겨울은 도처에 불을 피워가며 엔진을 수리하는 험난한 고개이기도 했다.

 

옛 초전비 자리는 커다란 고목과 함께 이 곳에 성황당이 차려져 마을 어르신과 지나는 길손은 복을 빌고 치성을 드리던 고개였다.

 

더불어 예부터 마을에 대나무가 아름답다 해서 죽미, 죽밑, 죽밋이라고 불렸다.

 

이 명칭은 죽미마을, 검디마을, 능골마을 등 3개 마을을 통칭한 것이다.

 

먼저 죽미 마을은 내삼미2동 서쪽 죽미령(고개) 밑이다.

 

지금은 세교택지개발지구에 죽미마을 아파트가 자리하고 새로 설치된 철도 동쪽에 여전히 마을을 지키는 4가구 만이 훌쩍 지나간 세월을 보여준다.

 

검디 마을은 내삼미동 가장 남쪽에 위치한다.

 

재 문헌서원이 자리한 지역으로 마을 앞에 진수렁이 많아 나무로 징검다리를 놓아 다녔다는 유래가 있다.

 

능골 마을은 내삼미2동 서쪽으로 3년 전 까지 경부철도와 접해 있었다.

인근에 죽미터널이 있다.

 

주인을 알 수 없는 능이 있었다는 설, 능참봉이 살고 있었다는 설 등의 유래가 전해진다.

 

▲ 신초전비 맞은편의 구초전비.

 

 

■ UN초전비

 

반월봉에 위치한 UN초전비는 6·25 한국전쟁을 전후로 수많은 야사와 실화가 전해 내려온다.

 

민족의 최대·최초 비극 한국전쟁의 바로미터(barometer:사물의 수준이나 상태를 아는 기준이 되는 것)를 보여주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기도 하다.

 

지금도 참전 16개국 국민을 비롯해 많은 외국인들이 전사의 탐방 및 참배유적지로 찾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초전비를 중심으로 금암동, 내삼미1·2동, 세교동, 양산동, 외삼미동 등 6개 동이 있었으나 금암동은 세교택지개발에 따라 신도시 아파트단지로 변했다.

 

▲ 구초전비 추도식 행사(1959년 7월5일).

 

■ 철도터널에 얽힌 전쟁의 참혹함

 

폐철로는 예전의 위치에 그대로 있으며 지금은 개인이 임차해 저온저장고로 사용하고 있다.

 

한국전쟁 무렵 북한 인민군은 이 터널을 탄약고로 사용했다.

 

터널안에 수원 쪽에서 화차에 탄약을 가득 실어 보관했으며, 주변에 야적된 각종 탄약이 사방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주변으로 유입됐다.

 

지금도 남아있는 삼미초등학교 아래 삼미저수지는 여름철이면 민물새우와 우렁이가 유난히 많았다.

 

동네 학동들이 이를 잡기 위해 목까지 차오르는 저수지 바닥을 맨발로 걷다보면 우렁이는 물론 포탄까지 발견됐는데 건져진 것들은 저수지 주변 논두렁에 쌓아 놓기도 했다.

 

또 능골 마을은 인민군들이 전쟁에 사용하기 위한 말(馬) 수십 마리를 관리하는 마방간이 됐었다.

 

마을의 달구지나 우마차를 동원해 수원비행장(적 치하에서 수원지역의 보급창 역활)근처에서 평택전선까지 탄약과 식량을 나르는데 사용했다.

 

이 뿐 아니라 초전비는 수많은 적군의 시신이 널려 있기도 했었다.

 

적(敵) 치하에서 1·4후퇴 당시 초전비 주변은 썩어가는 인민군 시신들이 널부러져 악취가 너무 심했다.

 

견디다 못한 부락민들이 포탄구덩이나 작전호에 장대로 밀어 넣어 가매장을 시키는 일이 빈번했다.

 

이렇게 묻고 몇 개월이 지나면 이 곳은 억새와 역기풀이 유난히도 잘 자랐다.

 

공산주의는 한국전쟁 전부터 기미를 보였다.

 

전쟁 전부터 활약하던 보도연맹(마을단위 북한의 앞잡이 단원)단들은 적 치하에서 광기가 더욱 심해 주·야로 민심을 선동하고, 불온문서를 배포하는 등 혼란으로 몰아갔다.

 

어떤 마을의 순경은 미처 피난하지 못해 피신하면서 위협을 느꼈다.

 

그는 당시 보도연맹 간부로 활동한 자신의 매제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매제는 그 자리에서 그를 총살했다.

 

이 처럼 한국전쟁은 민족분열이 극에 달하는 상황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시기였다.

 

초전비 서쪽은 1955년에 세워진 삼각추 모양의 옛 초전비가 자리해 매년 추모행사가 열렸었다.

 

현재는 1981년 국도 동쪽에 새로 세워진 초전비에서 매년 7월5일 호국영령의 진혼을 달래는 행사가 치러진다.

 

UN군 초전 추념식이다. 

 

이 같은 신·구 초전비는 한국전쟁의 참혹상을 생생한 역사로 간직하고 있다.

 

▲ 1950년대 구초전비 추도식 현장.

 

 

■ 고달픈 민중생활

 

한국전쟁에서 서글픈 민중들의 생활은 초전비에서도 드러난다.

 

1960년대 옛 초전비에서 추모행사가 열리는 날이면 인근 마을 주민들이 산기슭에서 기다리다가 식이 끝나기 무섭게 헌화에 사용된 꽃다발과 화환을 마치 선착순 경쟁하듯 집으로 가져갔다.

 

쓸만한 꽃을 가려 화병에 꽂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꽃이 귀했던 당시의 광경이다.

 

또 옛 초전비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기념비판이 부착돼 있었다.

 

크기는 1인용 밥상만 했는데 어느날 이 동판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뒤 송탄 미군부대 장병들이 다시 제작해 부착했지만 또 없어지자 경찰들이 마을들을 샅샅이 수색했다.

 

하지만 끝내 찾지 못하자 아예 대리석으로 다시 제작한 기념비판이 부착됐다.

 

전쟁 뒤 시골살림이 얼마나 곤궁했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또 있다.

 

전신주에 설치된 전선을 잘라가는 등 민생의 호구지책으로 벌어지는 도난사고가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보릿고개의 뼈아픈 1960년대 현실을 적나라하게 비추는 대목이다.

 

우리민족의 고통과 한이 서린 UN초전비는 오늘도 유유히 전란의 역사를 간직한 채 전쟁박물관이 역사를 대변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그 아래로 참전 16개국의 묘비가 세워진 기념공원에 전세계 우방국들의 역사가 살아 숨쉬고 있다.

 

필자는 오산시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면서 고향의 초전비를 소개하고 있다.

 

참전국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 국가 해설은 영어로 하면서 보람된 일에 긍지를 느낀다.

 

‘그대들의 피로 얼룩진 도움이 있었기에 오늘날 대한민국의 기초가 잉태하는데 더 할 나위 없는 이정표가 세워졌음이로다!’

 

이 사실을 절감하며 고마움을 간직하면서 문화관광해설사로 자부심을 갖는다.

 

▲ 1950년에 세워진 옛 초전비 입구 국기게양대. 목재로 만든 홍살문 중앙에 유엔기와 태극기가 걸리고 좌우로 16개 국기가 꽂힌 모습이 정겹다.

 

 

■ 한국전쟁 참전 16개국 암기법

 

필자는 이들 16개국을 외우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국기광장에 걸린 국기를 봐도 삼색기 국기가 어느 나라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여서 몇날며칠을 고민하던 끝에 그 해법을 찾았다.

 

이참에 단 번에 참전 16개국을 외우는 비법(?)을 공개하고자 한다.

 

먼저 16개국 나라는 다음과 같다.

 

1.아프리카공화국 2.그리스 3.미국 4.영국 5.네넬란드 6.필리핀 7.터키 8.룩셈부르크 9.타일랜드 10.오스트레일리아 11.뉴질랜드 12.벨기에 13.콜롬비아 14.에티오피아 15.프랑스 16.캐나다

 

암기방법은 먼저 나라 이름을 5개국-5개국-3개국-3개국으로 나누어 선정한다.

 

그 다음 앞자를 따서 문장을 만든다.

 

‘아그미영네 / 필터룸타오 /  뉴벨콜 / 해서 / 에프킬라 갖고 와’

 

풀이하면 이렇다.

 

‘아그미영네라는 집에 필터로 만들어진 방(룸)이 타고 있어요. 뉴벨한테 콜(전화)해서 에프킬라 갖고 와 불끄게 하시오’

 

우리나라 대동맥 국도1호선에 6·25한국전쟁을 상징하는 UN초전비가 오산의 첫 관문에서 사람들을 맞는 랜드마크로 역할과 차림새가 갖춰지기를 바란다.

 

미국을 선두로 참전 16개 우방국의 혈맹적 도움과 희생이 있었기에 한국전쟁을 지켜냈음은 자명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 것이다.

 

▲ 2010년 옛 초전비에서 바라본 죽미령. 세교지구 아파트단지와 국·전철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 당시를 기억하는 주민들

 

“전쟁중에 미군의 전투기(일명 쌕쌕이) 편대가 상·하 출입구를 폭격하는 바람에 2박3일 동안 폭발과 화염에 휩싸였다.

 

그건 불꽂놀이를 방불케 했고 주민들은 밤잠을 설쳤다.” (증언-윤동구·78)

 

“가끔 발견되는 수류탄(인민군:방망이 수류탄, 미군:파인애플 모양 수류탄)을 우리 또래들이 웅덩이나 저수지에 투척해 물고기를 수없이 잡았지요.” (증언-윤진구·76)

 

“당시엔 위험도 모르고 발에 걸리는 각종 포탄과 탄피를 건져 올리면서 우렁이를 잡았지요.” (증언-김건오·68세)

 

“초전비 주변 야산은 미군들이 후퇴하면서 버리고 간 씨레이션(전투식량), 모포, 배낭, 반합 등 군수용품이 즐비해 마을 사람들의 애장품과 고물 처리하는데 경쟁이 붙을정도였다.”(증언-이종만·82)

 

“어느 한 마을은 보도연맹 단원의 활동이 극심해 전쟁직전 국방군에 잡혀 동시에 30여 명의 단원이 처형되는 비극이 있었다. 전쟁 뒤 이 마을은 한날 한시에 마을 전체가 제사를 지내는 아픔이 남아있습니다.” (증언-이종만·82)

 

“생화가 얼마나 귀하고 신기했던지 고르고 간추려서 수원이나 평택지역 친지들에게 선물까지 했습니다.” (증언-이종만·82)

 

“동판 하나면 아마도 고물상에서 쌀 한 말은 족히 바꿨겠지요.” (증언-이종은·75세)

 

“터널 바닥에 녹아내린 납덩어리를 채집해 식량구입에 보태는가 하면 주변에 흩어진 포탄피에 붙은 신주를 정으로 빼내곤 했죠.”

 

“어느 주민은 능골 논 바닥에서 불에 탄 탱크위에 올라가 포신 바닥의 베아링을 빼내다 폭발하는 바람에 심각한 중상을 입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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