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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12월 새벽, 주위는 고요하다.

 

간혹 살갖으로 파고드는 찬 바람만이 존재감을 드러낼 때 김 할머니는 오늘도 작은 밀차를 끌고 집을 나섰다.

 

이렇게 조용한 시간에 움직여야 그나마 경쟁력이 있다.

 

힘깨나 쓰는 장정들 사이에서 김 할머니가 주울 폐지를 찾는 일이란 쉽지 않다.

 

기운있는 사람들이야 리어커에 100여 kg씩 주워 담지만 허리가 편치않은 김 할머니는 버겁다.

 

폐지를 싣는 일 조차 힘겨워 끈을 제대로 묶지 않아 개킨(옷이나 이부자리 따위를 겹치거나 접어서 단정하게 포갬) 종이상자들은 비뚤게 밀차 위에서 연명하고 있다.

 

오산시 원동에 사는 김인석 할머니는 올해 77세다.

 

1남5녀 가운데 5번째 딸로 태어 난 할머니는 남자이름을 지어야 사내 동생을 본다는 속설에  ‘인석’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 김인석 할머니(77·오산시 원동)가 모은 폐지 옆에 서있다. 할머니는 노환으로 허리가 불편하고 얼마 전에는 안면근육 마비로 치료를 받았다. 며칠 동안 모은 사진 속 폐지 가격은 3천원이다.

 

할머니 남편(85)은 골다공증으로 양쪽 넓적다리 뼈가 골절됐다.

 

한 번은 노인정에서, 한 번은 집에서 넘어진 부상이다.

 

할머니는 슬하에 아들 셋을 뒀다.

 

첫째는 가슴에 묻었고, 셋째는 형편이 어려워 오히려 도와줘야 할 판이란다.

 

쉰 줄이 넘은 둘째 아들과 함께 사는데 그 또한 사연이 많다.

 

54세 둘째 아들은 옛날 삼청교육대에 잡혀 갔다가 정신병을 얻어 돌아왔다.

 

군복무 시절 어느날 보초를 서고 있는데 취객이 시비를 걸어 엉덩이만 살짝 때렸단다.

 

그 뒤 삼청교육대에 끌려갔고 거기서 정신병을 얻었으며 20년이 넘는 세월에 결혼도 못하고 노부모에게 생계를 맡기고 있다.

 

김 할머니가 하루 벌어 생기는 수입 2~3천원은 고스란히 이 둘째 아들 담뱃값이란다.

 

그렇지 않으면  대뜸  “‘담배 사와!’라는 불호령이 떨어진다”고 김 할머니는 속상해 한다.

 

할아버지는 젊은시절부터 개인택시를 했다.

 

근 50년 핸들을 잡았다.

 

열심히 벌어 두내외 몸 누울 집 한칸 마련했고, 개인택시 명의를 정리해 근근이 살 형편은 된다.

 

하지만 딱히 수입이 없는 터라 아픈 몸을 이끌고 단 돈 몇 천원이라도 벌려고 엄동설한 칼바람을 맞으며 거리를 헤맨다.

 

눈 쌓인 지난 며칠은 집안에서 나오지도 못했다.

 

행여나 미끄러져 넘어지면 치료비가 더 드는 탓이다.

 

무슨 희망으로 사시느냐는 물음에 김 할머니는 “죽을 날만 기다리는 거지, 뭐”라고 말한다.

 

팔순을 바라보는 할머니가 가족들 뒷바라지에 자신의 아픔은 챙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폐지값은 2011년 추석 전 까지만 해도 1kg에 240원 선이었다.

 

값이 내려도 180~200원 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 한 시민이 상점 앞에서 폐지를 수거하고 있다. 이날(12월10일) 오산시 최저 기온은 기상청 기준 영하 11도였다.

 

그러다 지난해 추석을 기점으로 2012년 12월은 60~70원선이다.

 

고물상은 종이, 유리병, 플라스틱, 캔 등의 무게를 함께 잰다.

 

 ‘다른 좋은 것’은 따로 빼서 무게를 재지만 나머지 것 들은 가격이 비슷해서란다.

 

이 처럼 폐지값 폭락은 시장지배력이 높아진 일부 제지업체가 가격을 좌우한다는 설..

 

경기침체로 매출상품이 줄어 포장재 사용도 자연히 줄고, 이는 제지업체의 수요감소와 폐지값 폭락이라는 해석도 있다.

 

폐지를 가져가라고 하는 상점을 확보한 사람들은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다.

 

그 곳에서 배출되는 폐지만 모아 리어커로 실어오면 한달에 7~8만원 벌이는 된다.

 

조선족으로 6년 전 쯤 한국으로 왔다는 K씨(여)는 식당에서 일한다.

 

식당 주인은 그녀의 사정을 헤아려 가게에서 나오는 상자를 모아 고물상에 갖다 주라고 알려줬다.

 

그 덕에 K씨는 한 달 용돈벌이 정도의 수입을 폐지에서 얻는다.

 

직업으로 폐지를 수거하는 사람도 있다.

 

A씨(남)는 사업을 망친 뒤 4년 전 쯤부터 폐지를 수거하기 시작했다.

 

넉살좋은 그의 입담에 상자를 대주는 곳이 연이어 생겼다.

 

▲ A씨가 모은 폐지. 리어카가 무게를 재기 위해 고물상 앞에 세워져 있다.

 

그 돈으로 자식 2명을 대학에 보내고 생계도 유지한다.

 

그는 폐지값이 급격히 내린 것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중간상인들이  “다 해쳐먹어서 그런 것”이라고 했다.

 

또 오산에 폐지를 줍는 사람들이 무척 많다고 했다.

 

여기엔 기초생활수급자나 노숙인도 꽤 된단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처럼 상자를 공급해 주는 가게가 없으니  “죽으려고 하는 일”이란다.

 

수입도 안 돼고 몸은 힘드니 말 그대로  ‘살려고 하는 일’은 못된다는 것이다.

 

그는 정치인과 기업인 층에 깊은 불신을 드러냈으며  이 같은 이유로 “투표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같은 사람들 살려야지, 이게 얼마나 한다고 이 마저 중간에서 떼어 먹냐!”며 볼멘소리를 쏟아냈다.

 

그러게. 그 종이값 좀 올려주면 어때서..

 

그러니까 고물상이나 A씨나 똑같은 피해자란다.

 

인근 전자제품 매점 한 구석에서 60대로 보이는 노인이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몇 마디 물으니  “집 근처 사는데 여기(매점) 사람에게 양해를 구하고 며칠에 한 번씩 폐지를 가져 간다”고 말했다.

 

“돈도 돈이지만 건강이나 여러가지를 생각해서 나와 몸을 움직인다”고 했다.

 

말끔한 그의 행색이 그 말을 증명해주는 듯 보였다.

 

가끔씩이지만 조금만 부지런을 떨면 담뱃값이라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고물상 근방에서 처음 만난 할아버지는 70대로 보였는데 힘겨운 노동 탓인지 몇 마디 물음에 짧고 퉁명스런 대답만 내놓았다.

 

오전 10시가 갓 넘은 시간에 리어커에 종이, 상지, 유리병 등을 가득 실어 8천 원을 받아 갔다.

 

그 때 잠시 그의 얼굴에 기쁜 기색이 비쳤다.

 

앞서 김 할머니가 3천원을 받아 들고  “오늘은 많이 벌었네, 3천원”하던 만큼은 아니지만 슬쩍 내비치는 그의 눈가는 웃음을 놓치지 않았다.

 

실어 온 리어커에서 수거물을 내리고 그는 다시 폐지를 찾으러 떠났다.

 

발걸음이 매우 빨라 젊은 기자가 따라가기도 쉽지 않았다.

 

얼만큼 움직여야 그렇게 빨리 걷는 게 습관이 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그는 발도 빠르고 손도 날렵하게 움직이며 리어커에 종이 상자를 연거푸 접어 넣었다.

 

재차 말을 묻는 기자에게  “뭘 그렇게 따라다녀, 창피하게!”라고 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다 먹고 살기 퍽퍽해서 벌어진 일이니 이해할 수 밖에..

 

행정당국은 특별히 폐지수거인들에게 별도의 지원은 하지 않고 있다.

 

기초생활수급자 2천600명 가운데 몇 명이 폐지수거를 하는 지 조사된 수치는 없다.

 

다만 일선에서 폐지수거를 하는 사람들이 짐작하는 수거인의 수치는 상당수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먹고 살기 편한데 뭐하러 이걸 주우러 오겠냐”는 거다.

 

▲ 시내 한 켠 폐지를 가득 실은 리어카가 혹독한 겨울날씨 만큼이나 쓸쓸해 보인다.

 

오산시 환경과에 따르면 2011년초 지역에 소재한 고물상은 대략 60여 곳이다.

 

한 업소를 찾는 폐지수거인이 하루에 20명 정도라니 그 수가 대략 짐작이 간다.

 

오산에 사는 1천200명 정도의 사람들이 대부분은 하루에 2천원 벌이를 위해 혹은 8천원을 벌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눈길 강행군을 하고 있다.

 

폐지수거人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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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12-10 15:5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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