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꿈이 꺾인 군대, 위급시 다시 가겠다” - 유한형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오산지회 회원
  • 기사등록 2012-10-01 10:02:18
기사수정

【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태권도 사범이 꿈인 소년이 있었다. 소년은 어렸을 적부터 운동을 좋아했고 중학교 시절부터 사범의 꿈을 키워왔다.

 

꿈은 군대에서 꺾였다. 오른쪽 다리 인대파열로 소년의 꿈은 날개가 부러졌다. 그럼에도 “위급 시에는 다시 군대를 가겠다”고 말하는 유한형(53) 대한민국상이군경회 오산시지회 회원을 만나봤다.

 

▲ 유한형 대한민국상이군경회경기도지부 오산시지회 회원.

 

유한형 씨는 40년 전부터 ‘선생님이 학생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시대’가 올 것을 예견했다. 그러한 혼란의 시대에 학교와 사회 사이에서 아이들의 인성을 다듬을 사회교육자를 꿈꿨다.

 

그는 1978년 2월에 철원의 모부대에 입대했다. 약관(弱冠)의 싱그러운 청년이었다. 입대 전 이미 태권도 3단의 유단자였다. 그는 군대에서 부사관(하사관)으로 활동했으며 탱크를 지휘하는 전차장이었다.

 

▲ 유한형 씨는 대원동 주민센터 앞에서 붕어빵 장사를 한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붕어빵'을 기다리는 손님들로 매점 앞은 이따끔씩 만원 사례를 이룬다.

 

전차장이란 전차 한 대에 탑승하는 승무원 중 가장 선임자라 볼 수 있다. 부사관은 사관(장교)과 병사 사이의 간부로 부대 안에서 병사들을 통솔·교육하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는 부대 전투력 증강을 위해 태권도 교관을 했다. 사고 당시 그는 부대 내에서 태권도 대련 시범을 보였었다. 1981년도였다. 4단 심사를 목전에 둔 채였다.

 

▲ 정성으로 빵을 굽는 유한형 씨. 빵은 종류별로 다양하다. 팥앙금, 슈크림, 초컬릿 등 15종에 이른다.

 

운동을 좋아하고 오로지 그 꿈만을 키워왔던 그에게 오른쪽 다리 인대파열은 ‘꿈을 잃어버리는 것’이었다. 사고 후 그는 야전병원으로 후송됐다.

 

병원으로 이동 중 한 군의관은 “선임하사님, 이제 평생 병신으로 사십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은 그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였다.

 

세상의 모든 것을 잃은 기분이었다. 군용차의 구조를 꿰고 있는 그였다. 자해행위를 시도했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 다리에서 뛰어내리려 한 것이다.

 

그는 이내 마음을 고쳐 먹었다. ‘일단 병명이라도 알자’라고 생각한 것이다. 치료 절차는 간단하지 않았다. 야전 병원에서 1달 있은 후 후송에 2달, 부산통합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순이었다. 그것이 규정이었다.

 

▲ 유한형 씨는 "항상 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통합병원의 의사는 “근육이 인대가 지탱하는 힘을 대신하면 50살까지는 괜찮다”고 말했다. 의료 상황이 좋지 않아 수술을 하면 상태가 더 나빠졌을 정도라고 한다.

 

그는 수술을 받지 않았다. 부대 사정 등을 고려해 복귀했다. 2년여를 더 복무했다. ‘83년 말 전역했다. 피끓는 스물 다섯 살이었다.

 

불편한 몸에 직장도 녹록치 않았다. 직업훈련소를 거쳐 ’84년말 그는 중동행을 택했다. 그것이 중동으로 가는 마지막 차였다.

 

죽도록 그를 괴롭혔을 내면적 고뇌와 육체적 고통을 그는 일일이 열거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 이야기를 멈추는 그의 정적에서 그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어디를 가든 일을 잘했다. 두 번 일하지 않도록 말끔히 처리했다. 군대에서는 여단장 표창을 받았고 대기업 사장에게 상을 받기도 했다.

 

평택기계공고를 나온 그가 사전 두께만한 리포트를 3달에 걸쳐 영문으로 작성해 내자 모 대기업에서 스카웃 제의를 해왔다. 사업 구상 중이었던 그는 고사했다.

 

그는 아직도 진통제를 복용하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많다. 그것은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5년전 받은 MRI(magnetic resonance imaging 자장을 발생하는 커다란 자석 통 속에 인체를 들어가게 한다. 그 다음 고주파를 발생시켜 신체부위에 있는 수소원자핵을 공명시켜 각 조직에서 나오는 신호의 차이를 측정한다. 이를 컴퓨터를 통해 재구성 한 후 영상화하는 기술)검사에서 의사는 수술을 권유했다.

 

그는 과거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아픔을 주는 시간조차도 그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좋은 시간”이라고 말한다. ‘나를 생각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시간’이라고 그는 표현했다.

 

“삶은 나를 개선하고 채찍질하지 않고는 살아가기 힘들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 그렇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세상을 바로 보고 정신력으로 흔들리지 않으며 아픔을 참고 내 임무에 충실하면 길이 보인다. 생각의 차이다. 그것이 군인정신이다.”

 

그의 눈빛은 강경했다. 그의 어조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는 부상 후 곧바로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다. “내 의무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어서였다고 그는 말한다. 2005년 운영하던 자동차부품 사업이 하향길로 접어 들면서 신청하게 됐다.

 

국가유공자 상이등급 7급을 판정받았다. 한달에 몇십 만원의 보조금이 그의 고통의 날을 보상해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해보인다.

 

거기다 불편한 몸을 볼모로 하대하는 공무원과 몇몇 주위 시선이 그는 아프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있게 말한다.

 

▲ 환하게 웃어 보이는 유한형 씨.

 

“시간을 되돌려 다시 다칠 것을 알더라도 군대에 갈 것이다. 내가 아니면 누가 그 길을 가겠는가.”

0
기사수정
  • 기사등록 2012-10-01 10:02:18
나도 한마디
※ 로그인 후 의견을 등록하시면, 자신의 의견을 관리하실 수 있습니다. 0/1000
현재의견(총 4 개)
최근 많이 본 기사더보기
뉴스제보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