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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세상에 장사 보다 쉬운 일은 없다. 고객이 원하는 바를 신념 갖고 제공하면 손님이 그것을 먼저 알고 찾아온다”

 

천정무(53·오산시 세교동) 오산중앙전통시장상인회 총무이사의 말이다.

 

“근면·성실하면 돈은 벌리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1․4후퇴 때 월남한 아버지와의 이른 이별, 두 번의 사업 실패까지 그를 에웠던 ‘올무’를 이겨내고 연매출 수십 억원의 경영자가 되기까지 발자취를 들어 본다.

 

▲ 천정무 오산 중앙전통시장 상인회 총무이사.

 

 

■ 수제비 박사 납시오

 

천 총무이사는 수제비 박사였다.

 

된장, 고추장, 김치, 수제비 떡국 등 안 해먹어 본 수제비가 없다.

 

관련 논문을 낼 수 있을 정도라고 한다.

 

밀가루와 친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아버지는 1·4후퇴(1951년1월4일 중공군의 공세에 따라 정부가 수도 서울에서 철수한 사건) 때 월남했다.

 

6·25로 나라가 시끄러워 남으로 내려가야 할 지 시찰하기 위해서 였다.

 

그 뒤 올라가지 못했다.

 

천 총무의 숙부와 함께 였다.

 

이미 결혼을 한 채였다.

 

북에 남겨 둔 가족을 등지고 남한 생활을 시작했다.

 

남한에서 새 가정을 이루고 천 총무의 형과 누이 한 명을 낳았다.

 

향수병이 심했다.

 

그러던 어머니는 천 총무가 10살 때 돌아가셨다.

 

13살 때 아버지마저 어머니의 뒤를 이었다.

 

맞이 누이는 그때 집을 나갔다.

 

3살 터울 형과 둘만 남겨졌다.

 

세상에 둘 뿐 이었다.

 

천 총무는 새벽과 저녁에 신문을 돌렸다.

 

학비와 생활비를 충당했어야 했다.

 

형은 짬짬이 주유소에서 일을 했다.

 

중학교 진학을 하면서 교복 맞출 돈이 없었다.

 

옆집 선배가 입다 헤진 교복을 건넸다.

 

엉덩이에 호박만한 구멍이 났었다.

 

기울 천이 없었다.

 

속옷 상의, 일명 ‘메리야스’로 기워 입고 다녔다.

 

1년 동안이었다.

 

식량은 정부 지원으로 나오는 밀가루였다.

 

명절에는 밀가루로 떡국을 끓였다.

 

길쭉하게 모양낸 반죽을 상온에 일정 시간 두면 굳는다.

 

그것을 떡처럼 썰어 국을 끓였다.

 

그 둘만의 ‘떡국’이었다.

 

 

▲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눈시울을 닦는 천 총무이사.

 

■ 두 번의 사업 실패, 한 번의 이혼

 

그는 사업을 두 번이나 ‘말아 먹었다’.

 

번 돈을 일시에 상실하는 사업 실패는 그에게 버거운 산이었다.

 

1989년 4월 그의 첫 번째 사업이 수포로 돌아갔다.

 

빚 청산을 하고 남은 돈 500만원으로 부부는 제주도로 여행을 떠났다.

 

보름 간 일정에서 돌아와 그들은 싼 사글세 방으로 들어 갔고 세 달 동안 칩거했다.

 

상처는 얼마간 아문 듯 했다.

 

다시 일을 하겠다고 마음 먹고 직장을 구하러 가는 길이었다.

 

버스 운전을 하려 했던 그가 우연히 전단지를 보고 한 회사를 찾아갔다.

 

운수업 계통이었다.

 

처음 일주일은 오후 3~4시만 되면 일을 마쳐줬다.

 

의아해 하면서도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은 안 가고 왜 나만 가지’라는 생각을 하며 퇴근했다.

 

그 후부턴 오후 10시 이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다.

 

나중에 그 곳 사장이 천 총무를 “붙잡아 두려 그랬다”고 했단다.

 

그는 그 곳에서 육가공품을 납품했다.

 

열심히 일했다.

 

아침 8시30분이 출근시간이었으나 7시 이후에 출근한 적이 없다.

 

남몰래 청소도 해놓고 사무실 정리·정돈을 도맡았다.

 

대표에게 인정 받았다.

 

그렇게 상승세를 타던 천 총무에게 또 한 번 시련이 닥쳤다.

 

두 번째 사업 실패는 2000년이었다.

 

이 일로 첫 번째 아내와 결별하게 된다.

 

큰 딸과 사장의 집으로 들어 갔다.

 

 ‘숟가락 몇 개만 들고 들어가’ 방 한 칸에서 지내며 그는 고배를 삼켰다.

 

자살도 시도 했었다.

 

그 때마다 딸의 얼굴이 눈에 밟혀 그는 삶의 끈을 잡았다.

 

술과 담배를 끊고 머리도 짧게 깎았다.

 

매일 인근 학교 운동장을 돌며 결의를 다졌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 천 총무이사의 현재 거주하는 집 테라스.

2000년 즈음 구입한 주택은 임대를 주었다.

 

 

■ 다시 쓰는 나이 ‘마흔’

 

1990년부터 육가공 회사에서 일했던 천 총무는 말단에서 영업이사까지 올라섰다.

 

그 만의 영업전략으로 연봉 5천 만원 대의 중견간부를 맡았다.

 

두 번째 사업 실패 뒤 2000년 즈음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딸을 데리고 천 총무는 아파트 모델하우스를 보러 갔다.

 

“○○아, 이 집 어떠냐?”

 

“예뻐요.”

 

“우리 이 집 사자”

 

그는 계약금, 중도금은 회사 대표에게 빌리고 매월 급여에서 제하는 방식으로 집을 마련했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 천 총무이사의 첫 번째 정육점.

 

 

■ 연매출 수십억원 경영자 되기까지

 

그는 나름의 영업전략을 갖고 있다.

 

거래처를 확보할 때 첫 방문에서는 얼굴만 익히는 정도에서 멈춘다.

 

두 번째 봤을 때 업체가 원하는 정보를 제공한다.

 

세 번째 방문에서야 그의 신분을 밝히고 거래를 제안한다.

 

또 확보하려 하는 일대의 거래처를 사전 조사한다.

 

찾아갔을 때 반응이 좋았던 곳은 ◯표, 주인이 바빠서 못 봤거나 자리에 없는 경우는 △, 반응이 시큰둥하거나 내키지 않아했을 때는 X표를 해둔다.

 

다음 번 근방을 찾을 기회가 있을 때 ◯, △표 해놓은 곳은 꼭 방문한다.

 

방법은 통했다.

 

수도권에서 내로라하는 대형마트에는 천 총무의 고기가 안 들어가는 곳이 없을 정도다.

 

그렇게 상승가도를 달리고 있던 때 거래처 대표가 천 총무에게 마트 내 정육코너를 맡아달라는 제의를 해왔다.

 

고기와 유통방법까지 해박한 천 총무가 필요했던 것이다.

 

천 총무는 일주일간 고민 후 다니고 있는 회사의 대표에게 물었다.

 

대표는 천 총무의 ‘2Job'을 흔쾌히 인정해 줬다.

 

그  뒤 마트가 보증금 문제로 이전을 하면서 천 총무는 정육점을 운영하는 대표가 된다.

 

대한민국 육가공 정육점 영업에서는 거의 1호라고 그는 말한다.

 

지금은 2개의 정육점을 운영하며 육가공 납품까지 연매출 수십 억원 대의 최고경영자로 우뚝섰다.

 

▲ 시장 내 위치한 2호점.

 

그의 열심은 정육점에서도 빛을 발한다.

 

새벽 6시30분부터 밤 9시까지 그는 하루도 쉬어 본 적이 없다.

 

직원들 보다 일찍 나와 문을 열고 하루를 준비했다.

 

13년 동안이었다.

 

어느 날 새벽 문을 열고 손님 맞을 채비를 하는데 어떤 중년 남자 한 명이 택시에서 내려 가게로 들어왔다.

 

아내의 생일인데 고깃집이 문 연 곳이 없어 택시기사에게 물으니 이 곳을 안내해주더라는 것이다.

 

▲ 1호점에 붙어있는 그의 '신조'. 고객이 원하는 것을 제공하고 신념을 갖고 장사하면 '된다'고 말하는 천정무 총무이사.

 

새벽부터 밤까지 문을 열고 장사를 하는 것은 고객과의 약속이라고 천 총무는 말한다.

 

그의 가게 두 곳이 연중무휴인 것은 이 때문이다.

 

▲ 천 총무이사가 최초 도입한 양심 저울. 그 옆

차 없는 거리도 시행 중이다.

 

 

■ 최초 도입한 양심 저울

 

천 총무는 오산중앙전통시장에 양심저울을 최초 도입한 사람이다.

 

지인에 따르면 그는  ‘아이디어 뱅크’라고 한다.

 

펄떡펄떡 뛰는 그의 두뇌는 그의 가게 뿐 아니라 상인회, 시장 전체까지 변화를 일으킨다.

 

올 봄이었다.

 

중앙시장에서 물건을 사간 소비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구입한 매실의 무게가 다르더란 것이다.

 

전화한 소비자는 매실 한 상자를 구입했다.

 

상자에는 10kg이라고 써 있었는데 실상은 7.5kg밖에 되지 않았다.

 

천 총무는 매실 상인에게 원인을 물었다.

 

상인은 도매로 들어 온 것을 내준 것 뿐이라고 했다.

 

범행은 중간 상인에게서 일어났다.

 

농지에서 가져와 일정량을 덜어 내고 자신들이 만든 상자에 매실을 담아 팔았다.

 

상자에서 덜어낸 매실은 따로 팔아 이윤을 남겼다.

 

천 총무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대응책이 절실했다.

 

양심저울을 생각해 냈다.

 

시장 곳곳에 양심저울을 놓고 소비자가 무게를 ‘직접’ 잴 수 있도록 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앞으로 2곳을 더해 총 5군데에 저울을 놓을 계획이란다.

 

노점상과의 문제도 그는 해결했다.

 

시장 한 켠 도로를 차지해 절도 사건도 일어났던 곳 이었다.

 

그 곳 노점상 해산이 답이라 생각한 그는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권유했다.

 

옮길 곳에 가서 상인 한 명마다 30cm~50cm만 양보를 청했다.

 

그 곳 상인들은 응했다.

 

해산할 곳의 노점상인들을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늘을 찌를 듯한 자릿세와 오랜 시간 지켰던  ‘그들의 자리’를 순순히 내주지 않았다.

 

몇 개월 설득에 걸쳐 이동에 성공했다.

 

눈에 띄는 변화였다.

 

 

▲ 천 총무이사는 "시장은 보듬어주는 곳"이라고 말한다.

 

■ 생선, 정육, 야채, 먹을거리

 

“생선, 정육, 야채, 먹을거리가 잘 되면 그 시장은 흥한다.”

 

천 총무는 성공한 시장의 필수 요소를 위 4가지라고 말한다.

 

중앙시장은 먹을거리를 제외한 3가지에 강점이 있다고 한다.

 

수원, 안성, 용인 등지에서 고기를 사러 온다.

 

경쟁이 치열해 가격이 저렴한 탓이다.

 

경기도에서 가장 싼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손님이 원하는 바를 제공해야 가게가 홍보된다.”

 

많은 상인들은 자신이 원하는 품목을 할인한다.

 

“정작 소비자가 원하는 상품은 비싼 값을 받고 팔기에 가게 홍보가 덜 된다”고 천 총무는 역설한다.

 

소비자가 원하는 바를 속속들이 제공해 줌으로써 상인이 흥할 수 있다는 진리를 그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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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2-09-12 16: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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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견(총 3 개)
  • 청학동청년2012-09-14 12:17:41

    훌륭하신 우리의 이웃이었네요

  • 소비자2012-09-14 10:09:13

    많은 교훈을 주었어요,'재래시장 활성화 추진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알면 전통시장이 활성화 될 것인데,아쉽군요

  • 이화성2012-09-12 23:51:59

    천정무 오산중앙전통시장상인회 총무이사님! 감동과 교훈의 글을

    올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천정무님의 만수무강!과 만사형통!!을요

    진심으로 간절히 기원드리옵니다.감사합니다.그리고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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