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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인터넷뉴스】이영주 기자 = 오산은 지금 선사시대다. 금암동 지석묘부터 외삼미동까지 고인돌 천국이다. 외삼미동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방식과 남방식이 공존하는 곳으로 초미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다. 또 금암동에는 총 11기의 고인돌이 있는데 9기가 묘방이 있는 무덤의 고인돌이고 2기는 제단으로 쓰였던 고인돌이다. 최첨단 시대에 고리타분하게 무슨 돌이야기냐 하지 마시고 함께 떠나보자, 선사시대의 오산으로.

  ▲ 외삼미동 북방식 고인돌

 

일단 명칭부터 정리하자.
정정국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지석묘는 일본식 용어이다. 우리
말로는 고인돌이다. 고인돌의 어원은 '괸돌'에서 나왔다고 한다. 즉 '고여있는 돌'에서 발음이 변형돼 고인돌이 된 것이다.

 

  ▲ 할머니 바위(왼쪽)와 할아버지 바위(오른쪽 위 큰 돌)


금암동 지석묘군의 모태는 입구의 두 바위다. '할아버지·할머니 바위'라고 명명한 이
두 바위는 주변 모든 고인돌의 원석(原石)이다. 할머니 바위 앞에는 그보다 작은 바위조각들이 늘려 있는데 이것은 할머니 바위를 재료로 고인돌을 만들려고 잘라 놓은 것이다. 무심코 지나쳤던 돌들이 실상은 손자 손녀 아들 며느리까지 거느린 대가족이었던 셈이다. 그네들의 사연을 들으니 이 곳이 더욱 신비스럽다는 느낌이 든다. 

  ▲ 금암동 7호 고인돌 - 남방식이다.
 
고인돌에 관한 내용 중 흥미로운 것이 바로 이 남방식 고인돌 구별법이다. 남방식은 네 개의 굄돌 위에 큰 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는 상반되는 고인돌이다. 쉽게 말해 땅에 큰 돌 하나 올려져 있는 것이 남방식 고인돌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유관상 고인돌인지 구별이 힘들다. 그럼 어떻게 고인돌 여부를 구분할까? 바로 쇠꼬챙이이다. 보통 남방식은 고인돌 밑에 묘방을 만들고 거기에 무덤에 넣어주는 그릇이나 돌칼 등의 껴묻거리를 묻어준다. 이것이 구별의 단서가 된다. 땅 위로 드러난 돌 주변 밑 부분을 쇠꼬챙이로 찔러 쑤욱 들어가는 느낌이 나면 그것은 고인돌이다. 그렇지 않고 꽉 막혀 있다면 그것은 고인돌이 아니다. 묘방이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 금암동 11호 고인돌

 

그럼 본격적으로 금암동 고인돌군부터 둘러보자.

1호는 잘 다듬어져 있어 마치 잘 빗은 머리를 연상시킨다. 1호는 정확히 동서방향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옛 사람들의 방향에 대한 관심을 볼 수 있다.

2호는 크기가 작아 아기의 무덤이라고 추정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인들은 지역부족장이나 학자 혹은 지체가 높은 사람들의 무덤이기 때문이다.

3호는 입구쪽 논 가운데 있다. 돌은 대체로 그 자리에 있는데 주변 흙의 침식으로 고인돌의 위치가 조금씩 변화한다. 


 

  ▲ 금암동 4호 고인돌

 

고인돌은 신성한 기운이 있는 돌을 골라 쪼개 만들었다. 전체 고인돌 중 5%에 해당하는 고인돌만이 제당에 사용되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왕이나 부족장의 무덤이다. 지위가 높을수록 명당에 위치하게 되는데 고인돌 4호가 그러하다. 4호는 다듬지 않아 각진 모양이 특징이다.

4호에서 계단을 올라 언덕에 5호가 있다. 5호는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정정국 문화해설사에 따르면 오산에는 몇백 기의 고인돌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일본이 철길을 내기 위해 오산천 지류를 바꾸면서 지금의 오산천 방향이 생겼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많은 고인돌들이 떠내려갔다. 현재 남아 있는 고인돌은 '추남'에 속한다. 잘생긴 돌들은 이미 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 금암동 6호 고인돌

 

5호에서 6호까지 가는 길은 아담한 오솔길이다. 6호 주변에는 큰 바위들이 몇 개 놓여있는데 왼편에 있는 것만 묘방이 있다. 나머지 돌들은 고인돌을 하려다 중단했다는 것이다. 6호에서는 다량의 씨앗이 나왔다. 몇 천년이 지나도록 씨앗은 썩지 않고 무덤 안에 보존되어 있었다.

7호는 인근 아파트 공원 내에 위치했다. 이 역시 남방식으로 조용한 모습이 왠지 외롭다.

8·9호는 할머니 할아버지 바위이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커다란 크기이다.

바위색도 짙어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긴다.

  ▲ 정정국 문화해설사가 10호 고인돌을 설명하고 있다.

 

10호는 두 묘가 나란히 자리했다. 어떤 영특한 사람이 둘 사이에 묘를 썼다. 풍수지리를 떠나 묘 사이에 묘가 재미있다. 고인돌 주인은 지체가 높은 사람이니 그 기운을 받았으니 이보다 더한 명당이 있을까 싶다.

 

  ▲ 금암동 10호 고인돌(위 아래). 왼쪽 최순희 문화해설사

 

11호는 남방식 고인돌이다. 고인돌이기는 하나 묘방은 없다.

잠시 슬픈 이야기를 해야 한다. 도로 옆 방치된 고인돌 추정 돌이다. 이 돌은 인근 도로공사 관계로 컨테이너 옆에 뒹구는 신세다. 게다가 땅 주인은 땅값이 떨어지는 것을 염려해 고인돌이 확실함에도 고인돌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고인돌을 고인돌이라고 부르지 못하는 이 상황을 허균이 보았다면 뭐라 했을까?

 

  ▲ 컨테이너 앞 판자 밑에 깔려 있는 고인돌


세계적으로 7만여 개의 고인돌이 분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중 3만 6천여 개의 고인
돌이 한국에 있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고인돌 분포도가 높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외삼미동 고인돌 2기 (왼쪽 - 북방식  오른쪽 - 남방식)

 

외삼미동 고인돌 2기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북방식과 남방식이 한 곳에 있는 곳이다. 두 기 모두 성혈이라는 구멍이 나 있다. 남방식에는 3개, 북방식에는 16개가 있다. 성혈이란 제단으로 사용됐던 고인돌에 구멍을 뚫어 동물의 피를 넣었던 곳으로 알집이나 알구멍 등으로도 불렸다.


 

  ▲ 선명한 성혈 자국(3개)

 

이 곳의 북방식 고인돌은 굄돌을 뉘인 것이 특이하다. 이는 미학과 안정성을 고려한 설계다. 또 뉘인 굄돌 사이의 공간이 그대로 묘방이다.

고인돌이 남방식과 북방식으로 나눠지게 된 원인은 기후다. 북쪽에 존재하는 것을 북방식이라 하고 남쪽에 위치하는 것을 남방식이라고 일컫는다. 북방은 날씨가 추워 땅이 자주 얼었다. 그런 연유로 땅을 파기 힘들었고 대신 돌을 얹었다. 반면 남방식은 날이 푹했으므로 땅을 파기 용이했다. 지하에 묘방이 생긴 것은 이런 이유이다.

 

  ▲ 외삼미동 남방식 고인돌

 

정정국 문화해설사는 기자와의 탐방 동행에서 "사람들은 고인돌하면 보통 북방의 탁자식을 떠올리지만 땅을 파고 그 속에 묘방을 만든 남방식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고 했다.

여담이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이 하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 고인돌은 2개의 굄돌 위에 하나의 커다란 돌이 올려져 있는 형상이다. 그런데 원래의 고인돌 모양은 굄돌이 사방으로 둘러싸여 막힌 방의 형태라는 것이다. 그럼 나머지 돌들은 어디 있을까?

  ▲ 금암동 6호 고인돌 - 주변 바위는 고인돌을 만들려던 것이다.

 

사람들이 가져갔다고 한다. 집을 만드는데 사용하기도 하는등 여러 모로 쓰였다고 알려졌다.

또 고인돌에 쓰이는 재료는 무덤 주인이 생전 미리 준비해뒀다고 한다. 인도인이 사후 자신을 태울 장작을 사다두는 것과 같다.

  ▲ 선명한 성혈 자국 - 외삼미동 북방식 고인돌

 

지금까지 금암동 고인돌군과 외삼미동 고인돌 두 기를 살펴봤다. 금암동과 외삼미동 고인돌은 각 경기도 기념물 112·211호로 지정되어 있다.

오산에는 여러 문화재가 있다. 그 중 세마대, 궐리사, UN 참전기념탑은 꼭 알아야 하는 곳이라고 정 해설사는 말한다.

  ▲ 금암동 10호 고인돌 : 위 아래 고인돌 사이에 무덤이 있다.

 

문화재를 배우는 것은 묵은 공기를 숨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역대 가장 비싼 공연을 보는 것과 같다. 게다가 무료다. 3천년 전 왕족과 귀족이 기획한 그들의 마지막 축전(祝典)을 보고 싶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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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1-12-24 09:5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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