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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종암칼럼니스트

 

나폴레옹' 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말을 탄 채 이탈리아를 공격하기 위해 알프스 산맥을 넘는 모습의 그림을 연상케 한다. 그 그림은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던 '자크 루이 다비드' 의 작품이다. 그러한 나폴레옹은 법문화(法文化) 발전에도 지대한 공헌을 했다는 사실을 접할 수 있다. 바로 나폴레옹 민법전(民法典)이다. 세계사(世界史)와 비교법(比交法)을 연구하다 보면, 불란서(이하 프랑스와 불란서로 혼칭)가 봉건사회에서 프랑스혁명(1789년 6월 혁명)을 계기로 근대 민주주의로 변화하게 됨을 알 수 있다.

 

'1804년 나폴레옹 법전' 은 세계 최초의 근대적 민법전이다. 이 법전 법 제 7조에서는 "사권(私權)의 행사는 헌법적 법률에 따라 취득되고, 보유되는 시민의 자격으로 부터의 독립이다." 고 규정하고 있다. 본래 이 민법전의 이름은 프랑스인의 민법전이었으나, 이후 두 번의 개칭을 통해 50년 후 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최종적으로 나폴레옹 법전이라고 불러지게 된다. 그러나 중간에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루이 18세가 "프랑스의 모든 권위는 국왕에게 있다." 고 하면서 인민주권을 한 때 부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벌써 사회 저변에 미친 시민의 권리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법전은 유럽대륙과 일본에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리의 법(法)도 일정 부분 이를 계수(系受)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스페인과의 연합함대로, 이순신 제독의 한산대첩과 함께 세계 4대해전이라 불리는 1,805년 트라팔카 해전에서 영국의 넬슨 제독에게 패했다. 이 때는 라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에 오른 이듬해였다. 그는 또 다시 10년 후 영국과의 복수전을 벌인다. 그러나 이 워털루 전투에서도 영국에게 패하자 유배지 세인트 헬레나 섬에서 일생을 마친다. 권자와 조국에서 쫒겨난 그는 "나의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 는 유명한 말을 남겼지만 불천지 원수 영국을 이기지 못한 한(恨)을 품었을 것이다.

 

 

언젠가 영국의 BBC인터넷판 뉴스는 유배지에서 사랑하던 여자들을 그리면서 영어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불란서어를 영어로 번역해 가면서 공부했다는 것이다. 영국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착잡한 개인적 심정과 국가에 대한 섭섭한 마음도 있었으리다. 영국이 자기 조국 불란서의 적이었기에 싸울 수밖에 없었던 나폴레옹이 세계사에 과오도 있은 반면, 이러한 법문화에 지대한 공을 세웠음도 분명한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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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1-12-16 10:3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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